존 웨인 게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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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웨인 게이시는 194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연쇄 살인범으로, 1970년대에 최소 33명의 젊은 남성과 소년을 살해했다. 그는 광대 분장을 하고 지역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포고 더 클라운'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으며, 피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강간하고 살해한 후 집 지하실에 시신을 매장했다. 1978년 체포되어 33건의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80년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14년간의 수감 생활을 거쳐 1994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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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인 게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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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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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웨인 게이시 |
별칭 | 킬러 클라운 (Killer Clown), 광대 살인마 |
출생일 | 1942년 3월 17일 |
출생지 | 미국일리노이주시카고 |
사망일 | 1994년 5월 10일 |
사망 장소 | 미국일리노이주 크레스트힐, 스테이트빌 교도소 |
사망 원인 | 약물 주입에 의한 사형 집행 |
국적 | 미국 |
범죄 정보 | |
희생자 수 | 33+ 명 |
활동 지역 | 미국일리노이주, 아이오와주 |
범행 기간 | 1972년 - 1978년 |
체포일 | 1978년 12월 21일 |
유죄 판결 (아이오와) | 소도미 |
유죄 판결 (일리노이) | 살인 (33건), 아동에 대한 부도덕한 자유, 강간, 비정상적인 성폭행 |
형량 | 사형, 약물 주입 |
수감 장소 | 메나드 교도소 |
신체 정보 | |
신장 | 175cm |
체중 | 104kg |
가족 정보 | |
배우자 | 말린 마이어스 (1964년 9월 결혼, 1969년 9월 18일 이혼) 캐롤 호프 (1972년 결혼, 1976년 3월 2일 이혼) |
자녀 | 2명 |
2. 생애 초기
존 웨인 게이시는 1942년 3월 17일 시카고에서 존 스탠리 게이시와 마리온 엘레인 로비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 기계공이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으며,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166][167] 게이시는 폴란드와 덴마크 혈통이었고, 가족은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친조부모는 폴란드(당시 독일 프로이센의 일부)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166][167]
게이시는 어머니, 두 누이와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는 어려운 관계를 겪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육체적 학대를 가했으며, 게이시를 "멍청하고 바보 같다"며 깎아내렸다. 어린 시절, 게이시가 실수로 자동차 엔진 부품을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가죽 벨트로 맞았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학대에서 아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오히려 게이시는 "시시"하다거나 "괴짜로 자랄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학대에도 불구하고 게이시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절대로 훌륭하지 않다"고 느꼈다.[166]
1949년, 게이시의 아버지는 그와 다른 소년이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더듬는 것을 보고 면도날로 채찍질했다. 같은 해, 가족 친구가 게이시를 성추행하기도 했다. 게이시는 아버지 탓을 할까 봐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게이시는 과체중이었고, 심장 질환 때문에 학교에서 운동을 피해야 했다. 4학년 때부터 발작을 겪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충수염 파열로 입원했다.[166] 14세에서 18세 사이에 거의 1년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증상들이 관심을 끌기 위한 꾀병이라고 의심하며 비난했다.[166] 게이시는 쿨리 직업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1년 후 프로서 직업 고등학교로 전학했고, 2학년 때 중퇴했다.
고등학교 친구는 게이시의 아버지가 아들을 때리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한번은 이유 없이 게이시에게 소리를 지르며 때리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말리려 하자 게이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손을 들었을 뿐 아버지를 때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0년, 18세의 게이시는 지역 투표구 대표로 민주당 후보를 돕는 일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비판을 받게 했다. 게이시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아버지는 게이시에게 차를 사주었지만, 차값을 모두 지불할 때까지 차량 등록증을 아버지 명의로 유지했다. 1962년 4월, 게이시는 여분의 키를 구매했는데, 이에 아버지는 배전기 캡을 제거하여 사흘 동안 보관했다. 아버지가 캡을 다시 장착한 지 몇 시간 후, 게이시는 136달러를 가지고 사촌과 함께 살기를 바라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났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게이시는 구급차 서비스에서 일하다가 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그는 3개월 동안 장례식장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장의사들을 관찰하고 때때로 영구차 운반인 역할을 했다. 그는 방부 처리실 뒤 침대에 누워 잤으며, 어느 날 저녁, 10대 남성의 관에 들어가 시신을 껴안고 쓰다듬다가 급성 스트레스 반응을 느꼈다고 한다. 이 경험으로 인해 게이시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팜 빈소에서 일하는 동안 두 차례 시체애호증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시체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죽은 물건"이라고 표현했다.
귀향 후 게이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1963년에 졸업하고 Nunn-Bush 신발 회사에서 경영 연수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1964년, 회사는 그를 영업 사원으로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전근시켰고, 결국 부서 관리자로 승진시켰다. 그 해 3월, 그는 동료였던 말린 마이어스와 약혼했다. 게이시는 교제 기간 동안 제이시스 지역 지부에 가입했다. 같은 해, 그는 두 번째 동성애 경험을 했다. 게이시에 따르면, 제이시스 동료가 그에게 술을 권하고 소파에서 밤을 보내자고 초대했으며, 동료는 그가 취해 있는 동안 구강 성교를 했다. 1965년까지 게이시는 스프링필드 제이시스의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일리노이주에서 세 번째로 뛰어난 제이시로 선정되었다. 결혼하기 조금 전, 게이시는 술자리에서 만난 남성과 무의식중에 구강성교를 했다. 게이시는 아버지로부터 계속 들어온 말이 현실이 된 것에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다.
2. 1. 유년기
존 웨인 게이시는 1942년 3월 17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에지워터 병원에서 존 스탠리 게이시와 매리언 엘레인 로비슨의 세 자녀 중 둘째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168]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 기계공이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주부였다. 게이시는 폴란드인과 덴마크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게이시는 어머니와 두 누이와는 가까운 관계였지만, 가족에게 언어적, 신체적 학대를 가하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는 어려운 관계였다.[168] 게이시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 전에 거의 매일 밤 가족 지하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곤 했는데, 가족들은 그가 혼잣말을 하거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사망한 친구들과 가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자주 들었다. 게이시는 종종 아버지가 "바보"라 부르며 누이들과 비교하며 깎아내렸다.[168] 게이시의 가장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는 우연히 자동차 엔진 부품을 엉망으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4살 때 매를 맞은 기억이다.[168]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보호하려 했고, 그 결과 그는 "계집애"나 "엄마 아들"이며 "아마 괴짜로 자랄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168] 1949년, 게이시의 아버지는 그와 다른 소년이 어린 소녀를 성적으로 더듬는 것을 보고 면도칼로 채찍질했다.[168] 같은 해, 한 가족 친구가 때때로 게이시를 추행하기 시작했다.[168] 게이시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탓이 될까 두려워 말하지 않았다.[168] 어려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게이시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 눈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168]
게이시는 과체중이었고 운동 신경이 없는 아이였다. 심장 질환 때문에 그는 운동을 피하라는 말을 들었다.[168] 초등학교 4학년 때, 게이시는 실신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에피소드와 1957년 충수염 파열로 인해 때때로 병원에 입원했다.[168] 게이시는 나중에 14세에서 18세 사이에 거의 1년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추정했다. 그는 학업 성적 저하의 원인을 학교 결석으로 돌렸다. 게이시는 쿨리 직업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1년 후 프로서 직업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2학년 중간에 학교를 중퇴했다. 게이시의 건강 상태는 결론적으로 진단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꾀병을 부린다고 의심했다. 한 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 대놓고 꾀병을 부린다고 비난했다.
2. 2. 직업 기원
1960년, 18세의 게이시는 지역 투표구 대표로 민주당 후보를 돕는 일에 참여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아들을 "봉"이라고 부르는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비판을 받게 했다.[4] 게이시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했다고 회고했다.같은 해, 게이시의 아버지는 그에게 차를 사주었지만, 게이시가 차값을 모두 지불할 때까지 차량 등록증을 아버지 명의로 유지했다. 게이시가 아버지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는 차 키를 압수하곤 했다. 1962년 4월, 게이시는 여분의 키를 구매했는데, 이에 아버지는 배전기 캡을 제거하여 사흘 동안 보관했다.[4] 아버지가 캡을 다시 장착한 지 몇 시간 후, 게이시는 136달러를 가지고 사촌과 함께 살기를 바라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차를 몰고 집을 떠났다.[4]
게이시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구급차 서비스에서 일하다가 팜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그는 3개월 동안 장례식장 직원으로 일하면서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장의사들을 관찰하고 때때로 영구차 운반인 역할을 했다.[156] 그는 방부 처리실 뒤 침대에 누워 잤으며, 어느 날 저녁, 10대 남성의 관에 들어가 시신을 껴안고 쓰다듬다가 급성 스트레스 반응을 느꼈다고 한다.[156] 이 경험으로 인해 게이시는 집으로 돌아갔다.[156]
귀향 후 게이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1963년에 졸업하고 Nunn-Bush 신발 회사에서 경영 연수생으로 일하게 되었다.[156] 1964년, 회사는 그를 영업 사원으로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전근시켰고, 결국 부서 관리자로 승진시켰다.[156] 그 해 3월, 그는 동료였던 말린 마이어스와 약혼했다.[156]
게이시는 교제 기간 동안 제이시스 지역 지부에 가입했다.[156] 같은 해, 그는 두 번째 동성애 경험을 했다. 게이시에 따르면, 제이시스 동료가 그에게 술을 권하고 소파에서 밤을 보내자고 초대했으며, 동료는 그가 취해 있는 동안 구강 성교를 했다.[156] 1965년까지 게이시는 스프링필드 제이시스의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일리노이주에서 세 번째로 뛰어난 제이시로 선정되었다.[156]
1962년 (20세) 게이시는 아버지의 차를 빌리려다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후 "이제 당신은 지긋지긋해!"라고 말하며 라스베이거스로 가출했다.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3개월 동안 장례업자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낮에는 시체의 부패 방지 처리를 돕고, 밤에는 시체를 안치하는 처리실 옆 간이 침대에서 잠을 잤다.
일부 언론에서는 게이시가 젊은 남성의 시체를 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고, 마음에 드는 소년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 속에 들어가 시체의 피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게이시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 게이시는 시체 보관소에서 살았지만, 시체와 함께 잤거나 시체성애를 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156]
이후 시카고로 돌아온 게이시는 고등학교 중퇴였지만, 학력 검정 시험을 거쳐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의 1년 과정에 진학하여 회계와 상법 등을 배웠다. 칼리지 졸업 후에는 대형 신발 판매점 난 부시 슈즈의 세일즈맨으로 취업했다. 입사하자마자 뛰어난 영업 실적을 올려 젊은 나이에 지역 매니저로 발탁되었다. 또한 게이시는 미국 청년 회의소의 유력 회원이었으며, 회의소의 저축 판매권 판매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2년 후에는 주 전체에서 세 번째로 높은 활동 실적을 올려 제1부장에 취임했다. 1964년 (22세)에는 매릴린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아이오와주로 이주했다. 거기서 아내의 아버지가 소유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3개 매장의 매니저를 겸임하게 되었고, 사업과 지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인망을 얻었다. 게이시는 청년 회의소 차기 회장으로 유력했으며, "잠들지 않는 남자 게이시"라고 불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는 아버지 스탠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게이시는 친구들에게 "청년 회의소 회장을 맡으면 시의회에 출마하고, 2번 역임하면 다음은 시장이다. 거기서 확실한 실적을 만들어서 주 의회 상원이나 연방 하원으로 진출하고, 마지막에는 주지사를 목표로 할 거야"라며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업가로서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조정력도 뛰어나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루었고, 스탠리는 아들의 성공에 "내가 틀렸어, 존"이라고 사과했다.
결혼하기 조금 전, 게이시는 술자리에서 만난 남성과 무의식중에 구강성교를 했다. 게이시는 아버지로부터 계속 들어온 말이 현실이 된 것에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3년 후, 청년 회의소 회원의 아들인 15세 도널드 밸류스를 꾀어 포르노 영화를 보여주며 지하실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이후 밸류스는 게이시에게 돈을 요구했고, 게이시는 돈을 지불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회장 선거를 앞두고 밸류스가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고소하여 게이시는 체포되었다.
1968년 (26세)에 소년에 대한 성적 학대 죄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 사이 매릴린이 이혼을 제기하여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실형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지만, 7개월 만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고, 대학교의 통신 교육으로 심리학 등의 학점을 취득했다. 모범수였던 게이시는 주방의 조리사 보조 일을 맡아, 형무소 내 유력한 죄수와 간수에게 "스페셜 메뉴"를 제공하며 신뢰를 얻었다. 또한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하며 법률서와 심리학, 정신 의학 관련 서적을 읽어 지식을 쌓았다. 형무소 내 청년 회의소의 법률 상담원으로 활동하며 대우 개선 관련 법안을 주 의회에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징역 10년형에도 불구하고 16개월 만에 출소하여 일리노이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복역 중이던 1969년12월 25일, 아버지 스탠리가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게이시는 아버지의 장례식 참석을 요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2. 2. 1. 라스베이거스
게이시는 아버지가 배급사 모자를 교체하자 네바다주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그는 팜 빈소에서 수행원으로 일하기 전에 구급차 관련 일을 했다. 빈소 수행원으로 일하면서 게이시는 방부처리실 뒤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다. 석 달 동안 그는 장의사들이 시체를 방부처리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후 어느 날 저녁, 혼자 있는 동안 죽은 10대 남성의 관 속에 들어가 몸을 감싸안고 애무하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게이시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아버지는 이에 동의하여 게이시는 같은 날 시카고로 돌아갔다.게이시는 팜 빈소에서 일하는 동안 두 차례 시체애호증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시체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죽은 물건"이라고 표현했다.
2. 2. 2. 스프링필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게이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스웨스턴 경영대학에 입학했다. 1963년에 졸업하여 넌부시슈즈 컴퍼니에서 경영 연수생 직책을 맡았다.[156] 1964년, 신발회사는 그를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이직시켜 세일즈맨으로 일하게 했고, 결국 그를 자신의 부서장으로 승진시켰다. 그해 3월 그는 동료인 말린 마이어스와 약혼했다.게이시는 1964년 4월, 키 맨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이시(Jaycees)에 합류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같은 해, 그는 두 번째 동성애 경험을 했다. 게이시의 말에 따르면 스프링필드 제이시스에 있는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그에게 술을 마시며 저녁시간을 소파에 앉아 보내도록 초대한 후, 그는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 동료는 그가 술에 취한 동안 그에게 구강 성교를 했다. 1965년까지 게이시는 스프링필드 제이시스의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그는 일리노이주에서 세 번째로 뛰어난 제이시에 선정되었다.
게이시는 결혼하기 조금 전, 함께 술을 마시러 간 남성과 무의식중에 구강성교를 했다. 게이시는 아버지에게 계속 들어온 말이 현실이 된 것에 깊은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다.
3. 아이오와주 워털루
3. 1. KFC 회장
1964년 9월, 게이시는 마이어스와 결혼했다. 이후 마이어스의 아버지는 아이오와주 워털루에 위치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 레스토랑 세 곳을 인수했고, 게이시는 이 레스토랑들을 관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워털루로 이사하여 장인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이 제안은 게이시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는 연간 1만 5천 달러(2024년 기준 약 15만 3천 달러)의 급여와 레스토랑 수익의 일부를 받기로 했다.게이시는 KFC 매장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워털루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직원들이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칠 수 있는 '클럽'을 열었다. 게이시는 자신의 식당에 남녀 청소년들을 고용했지만, 주로 젊은 남성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술을 권하고 성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만약 그들이 이를 거부하면,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단순한 농담이나 도덕성 테스트였다고 변명했다.
1966년 2월에 게이시의 아내는 아들을, 1967년 3월에는 딸을 출산했다. 게이시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완벽한" 시기라고 회상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1966년 7월에 게이시의 부모가 워털루를 방문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그에게 가했던 학대에 대해 사과하며 "아들아, 내가 너에 대해 오해했었다"라고 말했다.
3. 2. 워털루 제이시스
워털루에서 게이시는 지역 제이시스 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는 3개의 KFC 식당을 관리하며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을 일하는 와중에도 정기적으로 제이시스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5] 회의에서 게이시는 종종 프라이드 치킨을 제공했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커넬"이라고 부르도록 했다.[5] 하지만 그는 다른 워털루 제이시스 회원들과 함께 마약 남용, 포르노, 매춘, 심지어 배우자 바꿔치기와 같은 부도덕한 행위에도 깊이 관여했다.[6][7]겉으로는 야심적이고 허풍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게이시는 뛰어난 모금 활동 능력으로 제이시스 회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1967년에는 워털루 제이시스의 "뛰어난 부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사회에서도 활동했다.[8][9] 이 시기 그의 사회적 활동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어두운 이면을 감추고 있었다.
3. 2. 1. 도널드 부흐의 습격
1967년 8월, 게이시는 지역 정치인이자 동료 청년회의소 회원이던 도널드 에드윈 부어히스의 아들인 15세의 도널드 부어히스 주니어를 성폭행했다. 게이시는 청년회의소 행사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는 이성애적 스태그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으로 부어히스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다. 게이시는 부어히스에게 술을 먹이고 스태그 영화를 보게 한 다음, "여자랑 성관계를 갖기 전에 남자랑 먼저 성관계를 가져야 해."라고 말하며 상호 구강성교를 하도록 설득했다.[6] 이후 몇 달 동안 게이시는 다른 여러 청소년을 학대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자신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도록 부추긴 다음 그를 협박해 자신에게 구강성교를 하도록 했다. 게이시는 또한 여러 십대에게 과학 연구를 위해 동성애 실험을 의뢰받았다고 속여 각각 최대 50달러를 지불했다.1968년 3월, 부어히스는 아버지에게 게이시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말했다. 부어히스 시니어는 즉시 경찰에 알렸고, 경찰은 게이시를 체포하여 부어히스에게 구강 성교를 하고 16세 에드워드 린치를 폭행하려 한 혐의로 기소했다. 게이시는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고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받기를 요구했다. 이 검사 결과는 "기만을 나타냈다." 게이시는 공개적으로 어떤 잘못도 부인하고 혐의가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부어히스 시니어가 게이시가 아이오와 청년회의소 회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몇몇 동료 청년회의소 회원들은 게이시의 말을 믿었고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1968년 5월 10일, 게이시는 구강 성교 혐의로 기소되었다.
{{인용문 상자
| quote = "검사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피험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완전히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환경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자신을 잡으려는 다른 사람들을 탓합니다... 피험자는 적대적인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묘사함으로써 동정심을 유발하려 시도합니다."
| source = 게이시의 1968년 정신 감정 보고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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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0일, 게이시는 직원 중 한 명인 18세의 러셀 슈로더에게 법정 증언을 막기 위해 부어히스를 폭행하면 300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6] 슈로더는 부어히스를 외딴 공원으로 유인하여 최루 스프레이를 눈에 뿌린 다음 그를 구타했다. 부어히스는 탈출하여 슈로더의 행동을 경찰에 신고했다. 슈로더는 다음 날 체포되었고, 처음에는 연루 사실을 부인했지만 곧 게이시의 요청으로 부어히스를 폭행했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게이시를 체포하여 슈로더를 고용해 부어히스를 폭행하고 위협한 혐의로 기소했다.
9월 12일, 게이시는 아이오와 대학교 정신 병원에서 정신 감정을 받도록 명령받았다. 두 명의 의사는 그가 반사회적 인격 장애 (소시오패스 및/또는 사이코패스의 임상 용어)를 가지고 있으며 치료를 통해 개선될 가능성이 낮고 그의 행동 패턴이 사회와 반복적인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의사들은 게이시가 재판을 받을 정신적 능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7]
4. 시카고로 돌아가기
게이시는 1970년 6월 18일, 10년 형기의 18개월을 복역한 후 12개월의 집행유예와 함께 가석방되었다.[1],[2] 가석방 조건으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시카고로 이사하고 밤 10시 통금시간을 지켜야 했다.[3],[4]
게이시의 석방 후, 친구이자 동료인 제이시 클래런스 레인이 감옥에서 그를 데리러 왔으며, 게이시의 무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유지했다. 하지만 게이시는 석방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카고로 이사했다.[3] 그는 6월 19일 버스를 타고 시카고에 도착했고, 곧 식당에서 단기 요리사로 일자리를 얻었다.[2]
1971년 2월 12일, 게이시는 시카고의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에서 10대 소년을 자신의 차로 유인하여 집으로 데려다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법원은 소년이 출석하지 않자 이 고소를 기각했다.[4] 같은 해 6월 22일, 게이시는 가중 성폭행과 무모한 행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이는 게이시가 보안관 배지를 보여주며 한 청년을 자신의 차에 태워 강제로 구강 성교를 시켰다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5] 그러나 이 혐의 또한 고소인이 게이시를 협박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취하되었다.[2]
아이오와 주 가석방위원회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알지 못했고, 8개월 후인 1971년 10월 게이시의 가석방은 종료되었다.[4] 그 다음 달, 게이시의 아이오와에서의 전과 기록은 봉인되었다.[2]
시카고로 돌아온 게이시는 파트타임 건설 사업인 "PDM 컨트랙터스"를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광대 "포고 더 클라운"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한편, 그는 종종 직원들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범죄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역구 대표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2] 이러한 활동은 그의 끔찍한 범죄 행각을 감추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도 있다.
4. 1. 8213 웨스트 섬머데일 애비뉴
존 웨인 게이시는 어머니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의 비법인지구인 노우드 파크 타운쉽의 노리지 마을 근처에 목장 주택을 구입했다. 그는 1978년 12월 체포될 때까지 웨스트 섬머데일 애비뉴 8213번지에 거주했으며 게이시에 따르면 그곳에서 모든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게이시는 지역 사회에서 활동적이었고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기꺼이 그의 건축 도구를 빌려주었고, 동네 산책로에서 눈을 무료로 갈았다. 1974년과 1978년 사이에, 그는 매년 여름 파티를 주최했고, 각각 특정 주제에 전념했다. 이들 행사에는 정치인을 포함해 최대 400명이 참석했다.
게이시는 어머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일리노이주 시카고 광역권의 일부인 쿡 카운티, 노우드 파크 타운십에 위치한 8213 웨스트 서머데일 애비뉴에 란치 스타일의 집을 구입했다. 그는 1978년 12월 체포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게이시에 따르면 모든 살인을 그곳에서 저질렀다.
게이시는 지역 사회에서 활동적이었고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기꺼이 건설 도구를 빌려주고 이웃의 눈을 무료로 치웠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그는 연례 여름 테마 파티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정치인과 사업 파트너를 포함하여 최대 400명이 참석했다.
4. 2. 재혼과 이혼
1971년 8월, 게이시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이사 온 직후 고등학교 시절 잠시 만났던 캐롤 호프와 약혼했다. 캐롤과 그녀의 이전 결혼에서 얻은 두 딸은 곧 게이시의 집으로 이사했고, 둘은 1972년 7월 1일 결혼했다.[173] 게이시의 어머니는 결혼식 직전에 집을 나갔다.[173]1975년 게이시는 아내에게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혔다.[173] 그해 어머니날 부부가 성관계를 가진 후, 그는 캐롤에게 이것이 마지막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173] 이후 게이시는 밤에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고, 캐롤은 그가 십 대 소년들을 차고로 데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집에서 게이 포르노와 남성 지갑, 신분증 등을 발견했다. 캐롤이 이에 대해 묻자 게이시는 화를 내며 상관할 바 아니라고 했다.[173]
1975년 10월, 수표 문제로 다툼이 벌어진 후 캐롤은 게이시에게 이혼을 요구했다.[173] 그녀는 1976년 2월까지 함께 살다가 딸들과 함께 아파트로 이사했고, 3월 2일 이혼이 확정되었다.[173] 캐롤과 재결합을 원했던 게이시는 1977년 말 다시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캐롤은 이듬해 다른 남성과 약혼했다.
4. 3. PDM 계약자
1971년, 게이시는 파트타임 건설 사업인 "PDM 컨트랙터스"를 설립했다. PDM은 "도장, 장식, 유지보수"(Painting, Decorating, and Maintenance)의 약자이다. 보호관찰관의 승인 하에 게이시는 낮에는 요리사로 일하고 밤에는 건축 계약을 맺었다. 초기에는 간판 설치, 콘크리트 작업, 재단장과 같은 소규모 수리 작업을 주로 맡았지만, 점차 인테리어, 리모델링, 설치, 조립, 조경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3년 중반, 게이시는 요리사 일을 그만두고 건설 사업에 전념했다.1975년, PDM은 빠르게 확장되었고 게이시는 하루에 16시간을 일했다. 1977년 3월에는 약국 리모델링 전문 회사인 PE 시스템즈의 감독자가 되었다. 게이시는 PE 시스템즈와 PDM을 통해 최대 4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며 여러 주를 자주 방문했다. 1978년, PDM의 연간 수익은 20만 달러를 넘어섰다.
4. 3. 1. 광대
게이시는 지역 무스 클럽의 회원 자격을 통해 "Jolly Joker" 광대 클럽을 알게 되었고,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입원한 아이들을 접대하는 것 외에도 기금 모금 행사와 퍼레이드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했다.[2] 1975년 말 게이시는 광대 클럽에 가입하여 자신만의 광대 캐릭터인 《포고 더 크라운》과 《패치 더 크라운》을 만들어 자신만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고안했다. 그는 포고를 "행복한 광대"로 묘사한 반면, 패치는 "더 진지한" 캐릭터였다.[3]
게이시는 그의 공연을 위한 돈을 거의 벌지 못했고 나중에 광대로 연기하는 것이 그가 "어린 시절로 퇴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지역 정당, 정치 행사, 자선 행사, 어린이 병원에서 포고와 패치로 공연했다.[2] 때때로 게이시는 공연이 끝난 후 광대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동네 술집에서 잠시 술을 마시곤 했다.[4][174] 게이시는 살인을 저지르는 동안 광대로서 자발적으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여 "킬러 광대"로 알려지게 되었다[175].
게이시는 지역 무스 클럽 회원으로, 회원들이 자선 행사와 퍼레이드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입원한 어린이를 자원봉사로 즐겁게 해주는 "졸리 조커" 광대 클럽을 알게 되었다.[2] 1975년 말, 게이시는 광대 클럽에 가입하여 자신의 캐릭터 "포고 더 클라운"과 "패치스 더 클라운"을 만들고, 자신만의 화장과 의상을 고안했다. 그는 포고를 "행복한 광대"로 묘사했고, 패치스는 "더 진지한" 캐릭터였다.[3]
게이시는 공연으로 돈을 거의 벌지 못했고, 나중에 광대 역할을 하는 것이 그가 "어린 시절로 퇴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포고와 패치스 둘 다로 수많은 지역 파티, 정치 행사, 자선 행사 및 어린이 병원에서 공연했다.[2] 게이시는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광대로 자원 봉사를 했기 때문에 "킬러 광대"로 알려지게 되었다.[14]
4. 3. 2. 직원들
PDM의 인력은 주로 고등학생과 젊은 남성으로 구성되었다. 게이시는 종종 노동자들에게 성관계를 제안하거나 차량 대여, 재정 지원, 승진 등을 대가로 성적인 요구를 했다.[11] 게이시는 또한 총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직원에게 "내 총 중 하나를 가져와서 당신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쉬울지, 그리고 시체를 없애는 것이 얼마나 쉬울지 아십니까?"라고 말했다.[15]1973년, 게이시는 10대 직원을 데리고 자신이 구입한 부동산을 보기 위해 플로리다로 여행을 갔다. 플로리다에서의 첫날 밤, 게이시는 호텔 방에서 직원을 강간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직원은 게이시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앞마당에서 그를 폭행했다. 게이시는 아내에게 부실한 그림 작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1975년 5월, 게이시는 15세의 앤서니 안토누치를 고용했다. 두 달 후, 게이시는 안토누치의 집으로 갔고 그가 발을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와인을 마신 후, 게이시는 안토누치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등 뒤로 수갑을 채우기 전에 이성애자 대상의 포르노를 시청했다. 안토누치는 수갑을 풀고 게이시에게 달려들었다. 고등학교 레슬링 선수였던 안토누치는 게이시를 제압하고 수갑 열쇠를 빼앗아 게이시의 손을 등 뒤로 수갑을 채웠다. 게이시는 처음에는 안토누치를 위협했지만, 곧 진정하고 수갑을 풀어주면 떠나겠다고 약속했다. 안토누치는 이에 동의했고, 게이시는 떠났다. 안토누치는 나중에 게이시가 그에게 "당신은 수갑에서 빠져나온 유일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 수갑을 채운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1976년 7월 26일, 게이시는 18세의 데이비드 크램을 히치하이킹으로 태워 PDM의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그날 저녁부터 일을 시작했다. 8월 21일, 크램은 게이시의 집으로 이사했다. 다음날, 크램과 게이시는 그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술을 마셨고, 게이시는 포고로 분장했다. 게이시는 크램을 속여 수갑을 채우게 했고, 그의 손목은 뒤가 아닌 몸 앞에서 수갑이 채워졌다. 그는 수갑을 연결하는 체인을 잡고 크램을 휘두른 다음, 그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했다. 크램은 게이시의 얼굴을 걷어차고 수갑에서 벗어났다.
한 달 후, 게이시는 크램의 침실 문 앞에 나타나 "데이브, 넌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원하는 걸 주면 좋을 거야."라고 말했다. 크램이 저항하자 게이시는 "넌 재미없어."라며 침실을 나섰다. 크램은 이후 2년 동안 게이시를 위해 주기적으로 일했지만 10월 5일에 이사를 나와 PDM을 떠났다.[177] 크램이 게이시의 집에서 이사 간 직후, 또 다른 직원인 18세의 마이클 로시가 이사 왔다. 로시는 1976년 5월부터 PDM에서 일했다. 그는 1977년 4월까지 게이시와 함께 살았다. 로시는 때때로 게이시가 개업 행사에서 광대 역할을 하는 것을 도왔는데, 게이시는 포고, 로시는 패치로 분장했다.
4. 3. 3. 정치
게이시는 지역 민주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직원들을 이용하여 당사 청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는 노우드 파크 타운십 가로등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지역구 대표라는 칭호를 얻었다.[2]
1975년에는 시카고에서 열리는 연례 폴란드 헌법의 날 퍼레이드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78년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 1978년 5월 6일, 게이시는 퍼레이드 행사장에서 특별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S" 핀을 착용한 채 영부인 로잘린 카터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비밀경호국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주었다.[2] 게이시의 민주당에 대한 충성심과 지역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끔찍한 범죄 행각을 감추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도 있다.
5. 살인 사건
## 살인 사건
존 웨인 게이시는 최소 33명의 젊은 남성과 소년들을 살해하고, 그 중 26명의 시신을 자신의 집 지하실에 묻었다.[19], [20] 그의 범행은 1970년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게이시는 희생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시카고의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이나 부그하우스 광장에서 만난 무작위의 사람들에게 PDM 건설에서의 일자리를 제안하거나, 술과 마약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성관계를 위한 돈을 제시하기도 했다. 어떤 희생자들은 강제로 납치되었고, 일부는 보안관 배지를 소지하고 검은색 올즈모빌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게이시를 경찰로 오인하기도 했다.[19], [20]
게이시는 종종 혼자 있는 희생자를 노렸지만, 하루 저녁에 두 명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집으로 유인한 후에는 술이나 마약을 먹이거나 신뢰를 얻은 뒤 수갑을 채워 제압했다. 그는 "마술 속임수"를 보여주겠다며 수갑을 사용했고, 희생자가 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 후 강간과 고문을 자행했다.[18] 게이시는 피해자의 가슴 위에 앉거나 몸을 얹어 펠라치오를 강요하고, 시가로 지지거나, 목에 고삐를 씌워 말을 흉내 내게 하는 등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또한, 휴스턴 연쇄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발목을 묶는 장치를 사용하기도 했다.[19], [20]
살해 방법은 주로 밧줄 지혈대를 목에 두르고 망치 손잡이로 조여 질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밧줄 트릭"이라고 불렀으며, 희생자에게 "이것이 마지막 트릭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때로는 희생자가 죽기 전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목구멍에 천을 쑤셔 넣어 질식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두 희생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살해되었다.[19], [20]
게이시는 시신을 최대 24시간 동안 침대 밑에 보관한 후 지하실에 묻었다. 생석회를 뿌려 부패를 촉진했으며, 일부 시신은 차고로 옮겨져 방부 처리되기도 했다.
1974년 1월경, 게이시는 두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 신원 미상의 희생자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옷장에 보관하다가 매장했다. 그는 희생자의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카펫을 더럽혔다고 진술하며, 이후 희생자들의 입에 헝겊, 속옷, 양말 등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19], [20],
1975년 7월 31일, 롬바르드 출신의 18세 PDM 직원 존 뷰트코비치가 실종되었다.[181] 뷰트코비치는 실종 전날 게이시에게 밀린 급여를 요구하며 맞섰다. 게이시는 나중에 웨스트 로렌스 애비뉴 모퉁이에서 뷰트코비치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고 인정했다. 게이시에 따르면 뷰트코비치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며 자신의 차로 다가갔다. 게이시는 뷰트코비치를 그의 차로 초대한 다음, 표면적으로는 그의 체불 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뷰트코비치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서 게이시는 뷰트코비치에게 술을 권한 다음,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도록 속였다. 게이시는 이후 뷰트코비치의 목을 졸랐다. 그는 뷰트코비치의 시신을 차고에 보관했고, 나중에 기어다니는 공간에 시신을 묻으려고 했다.
게이시는 사업 확장이 이루어진 1975년이 젊은 남성들과의 성관계 빈도를 늘리기 시작한 해라고 밝혔으며, 이러한 행위를 "순항"이라고 불렀다.
1976년, 게이시는 18세의 다렐 샘슨을 납치해 살해했다. 5월 14일, 15세의 랜달 레펫은 치과 진료를 마치고 업타운의 집으로 돌아온 직후 실종되었다. 14세의 새뮤얼 스테이플턴은 그의 누나의 아파트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중 사라졌다. 게이시는 마이클 보닌, 윌리엄 캐롤, 제임스 하켄슨, 릭 존스턴, 케네스 파커, 마이클 마리노, 윌리엄 번디, 프랜시스 알렉산더, 그레고리 고지크 등 수많은 젊은이들을 살해했다. 고지크는 PDM에서 일하던 중 실종되었으며, 게이시는 그에게 지하실에서 배수 타일을 위한 참호를 파도록 시켰다고 한다.
1977년 1월 20일, 게이시는 19세의 존 시크를 그의 플리머스 새틀라이트를 구매하겠다는 구실로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목 졸라 죽였다.[196] 두 달 후인 3월 15일, 20세의 존 프레스티지가 실종되었다. 7월 5일, 게이시는 19세의 매튜 보우먼을 살해했다. 그해 말까지 게이시는 로버트 길로이, 존 모워리, 러셀 넬슨, 로버트 윈치, 토미 볼링, 데이비드 탈스마 등 6명의 젊은 남성을 더 살해했다. 12월 30일, 게이시는 로버트 도넬리를 납치해 강간하고 고문했지만 풀어주었다.
1978년 1월 6일, 경찰은 게이시를 심문했지만 기소하지 않았다. 다음 달, 게이시는 윌리엄 킨드레드를 살해했다. 3월 21일, 게이시는 제프리 링날을 차로 유인해 고문했지만 링날은 탈출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1978년 중반까지 지하실에는 더 이상 시체를 묻을 공간이 없었고, 게이시는 시체를 I-55 다리에서 데스 플레인스 강으로 버리기 시작했다. 티모시 오루크, 프랭크 랜딩인, 제임스 마자라 등이 이 강에 버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11일, 게이시는 로버트 피스트를 살해했다.
게이시의 범행은 1978년 로버트 피스트 살해 사건을 계기로 수사가 시작되어, 그의 집 지하실에서 26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사회에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게이시 사건은 단순한 범죄 사건을 넘어, 당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5. 1. 티모시 맥코이 살해 사건
게이시의 첫 번째 살인은 1972년 1월 3일에 일어났다. 게이시는 훗날 진술에서 1월 2일 저녁 가족 파티에 참석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 얼음 조각 전시회를 보기 위해 루프에 있는 시빅 센터로 차를 몰고 갔다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미시간주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고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던 16세의 티모시 잭 맥코이를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에서 자신의 차로 유인했다. 게이시는 맥코이에게 시카고 시내를 구경시켜 준 다음, 하룻밤 묵고 제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도록 역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18]맥코이는 신원이 확인되기 전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 소년"으로 알려졌다.
게이시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엌칼을 들고 침실 문간에 서 있는 맥코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게이시의 주장에 따르면 맥코이는 항복의 몸짓으로 두 팔을 들어 칼을 위로 향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실수로 게이시의 팔뚝을 베었다. 게이시는 맥코이의 손목에서 칼을 비틀어 빼앗고 침실 벽에 머리를 부딪히게 한 다음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맥코이가 게이시의 배를 걷어차자 게이시는 맥코이를 붙잡고 "이 개자식아!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치며 바닥에 쓰러뜨린 후 가슴을 반복적으로 찔렀다.
맥코이가 죽자 게이시는 욕실에서 칼을 씻은 후 부엌으로 가서 식탁 위에 계란 상자와 베이컨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맥코이는 식탁을 2인용으로 차려놓고 칼을 든 채 게이시를 깨우려고 방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게이시는 맥코이를 지하실에 묻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덮었다. 체포 후 인터뷰에서 게이시는 맥코이를 살해한 직후 "완전히 지쳤다"고 말했지만, 맥코이를 칼로 찌르고 "신음소리"를 들으며 숨을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그때 죽음이 궁극적인 스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5. 2. 두 번째 살인
1974년 1월경, 게이시는 두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179][180] 신원 미상의 희생자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옷장에 보관하다가 매장했다.[19][20] 그는 희생자의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카펫을 더럽혔다고 진술하며, 이후 희생자들의 입에 헝겊, 속옷, 양말 등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179][180], [19][20],석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시는 소년 폭행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피해자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불기소 처리되었다. 같은 해 가을부터 그는 파티에서 만난 소년들을 노리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에는 "주운" 청년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아침에 깨어보니 청년이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공포를 느껴 격투 끝에 찔러 죽였다. 사실 청년은 게이시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고, 칼을 든 채 그를 깨우려 했던 것이다. 혼란에 빠진 게이시는 시신을 마룻바닥 아래에 숨겼다. 이 사건 이후 살인이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게이시는 경식당 요리사로 일하면서 실내 장식 및 증개축 사업을 구상하며 돈을 모았고, 1971년(29세) 시카고 노우드 파크 근처에 집을 구입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PDM 건설"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고등학교 동창 캐롤과 결혼하여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휴일에는 광대 "포고"로 분장하여 복지 시설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지역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지부의 선거구 간사장이 되었고,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악수하는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게이시는 자신의 의식 장애가 기억 상실을 동반했으며, 광대 포고로 변신했을 때 안정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소년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강간 후 살해했다. 피해자를 유인하는 방법은 "포르노를 보지 않겠냐"고 꾀어 지하실로 데려간 후 수갑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흉기로 위협하며 강간하는 것이었다. 살해 방법은 주로 소년들이 목에 걸고 있던 묵주에 볼펜을 넣어 질식시키는 것이었다. 살해 후 시체는 마룻바닥 아래에 매장하고 석회나 염산을 뿌렸다. 1975년 말, 게이시는 캐롤과 이혼했고, 이후 희생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5. 3. 존 뷰트코비치 살해 사건
1975년 7월 31일, 롬바르드 출신의 18세 PDM 직원 존 뷰트코비치가 실종되었다.[181] 뷰트코비치의 차는 셰리던과 로렌스의 모퉁이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고, 그의 재킷과 지갑은 안에 있었으며, 열쇠는 여전히 점화 장치에 꽂혀 있었다.뷰트코비치는 실종 전날 게이시에게 2주간의 밀린 급여를 요구하며 맞섰다. 유고슬라비아 이민자였던 뷰트코비치의 아버지는 게이시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을 찾는 것을 돕게 되어 기쁘지만, 뷰트코비치가 "도망쳤다"고 말했다. 게이시는 경찰 조사에서 뷰트코비치와 친구 2명이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그의 집에 도착했지만, 타협점을 찾았고 3명은 모두 떠났다고 진술했다. 이후 3년 동안 뷰트코비치의 부모는 경찰에 100번 이상 전화를 걸어 게이시를 더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게이시는 나중에 웨스트 로렌스 애비뉴 모퉁이에서 뷰트코비치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고 인정했다. 게이시에 따르면 뷰트코비치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며 자신의 차로 다가갔다. 게이시는 뷰트코비치를 그의 차로 초대한 다음, 표면적으로는 그의 체불 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뷰트코비치를 그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에서 게이시는 뷰트코비치에게 술을 권한 다음,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도록 속였다. 게이시는 이후 뷰트코비치의 목을 졸랐다. 그는 뷰트코비치의 시신을 차고에 보관했고, 나중에 기어다니는 공간에 시신을 묻으려고 했다. 아내와 의붓딸들이 예상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자, 게이시는 뷰트코비치의 시신을 당초 배수 타일을 파려던 빈 공간에, 자신의 차고 연장 공구실 콘크리트 바닥 밑에 묻었다.
5. 4. 순항의 해
게이시는 사업 확장이 이루어진 1975년이 젊은 남성들과의 성관계 빈도를 늘리기 시작한 해라고 밝혔으며, 이러한 행위를 "순항"이라고 불렀다. 게이시는 이혼 후 혼자 살았던 1976년과 1978년 사이에 대부분의 살인을 저질렀으며, 이때를 그의 "순항의 세월"이라고 칭했다.게이시는 사교적이고 시민 의식을 유지했지만, 1976년 이혼 이후 몇몇 이웃들은 그의 행동에서 불규칙한 변화를 감지했다. 젊은 남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거나, 이른 아침에 그의 차가 드나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집 안의 불이 일찍 켜졌다 꺼지는 모습 등이 관찰되었다. 한 이웃은 새벽 시간에 비명, 고함, 울부짖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 잠에서 깨어났으며, 그 소리가 게이시의 집에서 나는 것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출소한 지 6개월 만에 게이시는 소년 폭행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고소인이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기소되지 않았다. 그해 가을부터 게이시는 파티에서 만난 소년들을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고, 이듬해 1월에는 한 청년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청년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몸싸움을 벌이다 그를 찔러 죽였다. 사실 청년은 게이시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고, 칼을 든 채 게이시를 깨우려 했던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혼란에 빠진 게이시는 시체를 마룻바닥 아래에 숨겼으며, 이후 살인은 그의 습관이 되었다.
본래 경식당 요리사였던 게이시는 실내 장식 및 증개축 사업을 통해 자립하기로 결심하고, 1971년(29세) 시카고 노우드 파크 근처에 집을 구입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타고난 근면함으로 "PDM 건설"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캐롤과 결혼하여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휴일에는 광대 "포고"로 분장하여 복지 시설을 방문하는 등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지역 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지부의 선거구 간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악수하는 사진이 남아있는데, 이로 인해 영부인이 성범죄자와 만나게 되었다는 비판과 함께 비밀 경호국의 조사 능력 부족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게이시는 자신의 의식 장애가 일종의 기억 상실을 동반했으며, 광대 포고로 변신했을 때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게이시는 많은 소년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강간 후 살해했는데, 주로 "포르노를 보지 않겠냐"며 유인하여 지하실로 데려간 뒤 수갑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흉기로 위협하며 강간했다. 살해 방법으로는 소년들이 목에 걸고 있던 묵주에 볼펜을 넣어 질식시키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살해 후 시체는 마룻바닥 아래에 매장하고 석회를 뿌렸으며, 때로는 염산을 사용하기도 했다. 1975년 말, 게이시는 캐롤과 이혼한 이후 희생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5. 4. 1. 1976년
이혼이 확정된 지 한 달 후, 게이시는 18세의 다렐 샘슨을 납치해 살해했다. 샘슨은 1976년 4월 6일 시카고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게이시는 샘슨을 식당 아래에 묻었고, 그의 목에는 천 조각이 박혀 있었다.[182] 5월 14일, 15세의 랜달 레펫은 치과 진료를 마치고 업타운의 집으로 돌아온 직후 실종되었다.[183] 레펫이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 몇 시간 후, 14세의 새뮤얼 스테이플턴은 그의 누나의 아파트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중 사라졌다. 스테이플턴과 레펫은 가까운 사이였고, 그들은 함께 지하실에 묻혔으며 수사관들은 두 사람이 같은 날 저녁에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다.6월 3일, 게이시는 시카고에서 워키건으로 이동하던 중 실종된 17세의 마이클 보닌을 살해했다. 게이시는 보닌을 교살(ligature)로 목 졸라 살해한 후 빈 침실 아래에 묻었다. 열흘 후, 게이시는 16세의 윌리엄 캐롤을 살해하여 지하실의 공동 묘지에 묻었다. 캐롤은 1976년 6월 13일부터 8월 6일 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4명의 희생자 중 첫 번째 희생자로 보인다. 3명은 16세에서 17세 사이였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 명의 희생자는 성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5일, 16세의 제임스 하켄슨이 게이시의 집에서 가족에게 전화한 것이 마지막으로 알려졌다. 하켄슨은 질식사했다. 그의 시신은 8월 6일에 마지막으로 생존한 모습이 목격된 17세의 릭 존스턴의 아래 지하실에 묻혔다.
게이시는 1976년 8월과 10월 사이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남성 2명을 살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10월 24일, 게이시는 십 대 친구 케네스 파커와 마이클 마리노를 납치하여 살해했는데, 이들은 시카고의 클라크 가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이틀 후, 19세의 건설 노동자 윌리엄 번디는 가족에게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알린 후 실종되었다. 번디는 질식사했다. 게이시는 번디의 시신을 자신의 안방 아래에 묻었다. 번디는 분명히 게이시를 위해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6년 11월과 12월 사이에, 게이시는 21세의 프랜시스 알렉산더를 살해했다. 알렉산더가 가족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은 11월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그 직후 캘리포니아로 이사 갔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게이시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방 아래에 묻혔다.
1976년 12월, 17세의 그레고리 고지크가 실종되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그녀의 집 밖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고지크는 PDM에서 3주도 채 일하지 않았을 때 실종되었다. 그는 가족에게 게이시가 자신에게 지하실에서 "어떤 종류의 (배수) 타일을 위한 참호를 파도록" 시켰다고 말했다. 고지크의 차는 나중에 나일스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부모와 누나는 게이시에게 고지크의 실종에 대해 연락했다. 게이시는 고지크가 집에서 도망가고 싶어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지크가 실종된 직후 음성 사서함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고지크의 부모에게 그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는지 묻자, 게이시는 그것을 지웠다고 말했다.
5. 4. 2. 1977년
1977년 1월 20일, 게이시는 19세의 존 시크를 그의 플리머스 새틀라이트를 구매하겠다는 구실로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다. 그는 나중에 시크를 자신의 여분 침실에서 목 졸라 죽였다고 자백했으며, 다음 날 아침 로시가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게이시는 나중에 그 차를 로시에게 300달러에 팔았다.두 달 후인 3월 15일, 20세의 존 프레스티지가 실종되었다. 프레스티지는 노스 사이드의 한 식당을 나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는 프랜시스 알렉산더의 시신 위에 있는 지하실에 묻혔다. 실종되기 직전, 프레스티지는 지역 계약업체와 일자리를 구했다고 언급했다.[39] 게이시는 1977년 봄이나 초여름에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청소년 한 명을 더 살해하여 지하실에 묻었다. 7월 5일, 게이시는 19세의 매튜 보우먼을 살해했다. 보우먼의 어머니는 그를 교외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는데, 그는 하우드 하이츠로 법원 약속을 위해 여행할 예정이었다.
다음 달, 로시는 시크의 차를 운전하다가 휘발유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 주유소 직원은 번호판을 확인했고, 경찰은 그 차가 게이시의 집으로 연결된 것을 추적했다. 심문을 받자, 게이시는 시크가 2월에 그에게 차를 팔았다고 말했고, 그는 도시를 떠날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대 번호를 확인한 결과 그 차가 시크의 소유였음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더 이상 이 문제를 추적하지 않았지만, 시크의 어머니에게 그녀의 아들이 차를 팔았다고 알렸다.
1977년 말까지 게이시는 16세에서 21세 사이의 젊은 남성 6명을 더 살해했다. 이들 중 첫 번째 희생자는 시카고 경찰 기동대원의 아들인 18세의 로버트 길로이였으며, 9월 15일에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길로이는 게이시의 집에서 4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는 지하실에 묻혔다. 9월 12일, 게이시는 피츠버그로 날아가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감독했고, 9월 16일까지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았다.[35] 길로이가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을 때 게이시는 다른 주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게이시가 여러 살인 사건에서 한 명 이상의 공범의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된다. 길로이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지 10일 후, 19세의 전 미국 해병대 존 모워리가 어머니의 집을 떠난 후 실종되었다. 게이시는 모워리를 목 졸라 죽이고 안방 밑에 시신을 묻었다.
10월 17일, 21세의 러셀 넬슨이 실종되었고, 시카고의 한 술집 밖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넬슨은 계약직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39] 게이시는 그를 살해하여 객실 밑에 묻었다. 4주도 채 지나지 않아 게이시는 16세의 로버트 윈치를 살해하여 지하실에 묻었다. 20세의 토미 볼링은 11월 18일 시카고의 한 술집을 떠난 후 실종되었다. 12월 9일, 19세의 미국 해병대 데이비드 탈스마는 어머니에게 해먼드에서 열리는 록 콘서트에 갈 것이라고 말한 후 실종되었다. 게이시는 끈으로 탈스마를 목 졸라 죽이고 존 모워리 근처 지하실에 묻었다.
12월 30일, 게이시는 시카고 버스 정류장에서 19세의 대학생 로버트 도넬리를 총으로 납치했다.[36] 게이시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강간하고 고문했으며, "오늘 밤 재밌는 게임을 하는 거 아니야?"와 같은 말을 하며 욕조에서 도넬리를 여러 번 물에 빠뜨려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도넬리는 나중에 재판에서 자신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게이시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게이시는 "곧 그렇게 할 거야"라고 대답했다. 몇 시간 후, 게이시는 도넬리를 자신의 직장으로 데려가 풀어주면서 경찰에 불평하면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경식당 요리사로 일하면서 실내 장식 및 증개축 등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 사업으로 자립하기로 결심한 게이시는 저축에 힘쓰면서 사업 계획을 세우고, 1971년(29세) 시카고 노우드 파크 근처에 집을 구입했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그는 자신의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타고난 근면함으로 "PDM 건설"이라는 회사를 궤도에 올리자,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캐롤이라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녀의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휴일에는 광대 "포고"로 분장하여 복지 시설을 방문하는 등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또한 지역 민주당의 당원이 되어 두각을 나타내 지역 지부의 선거구 간사장이 되었고, 파티장에서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악수하는 사진이 남아있다.
게이시 본인에 따르면, 그의 의식 장애는 일종의 기억 상실을 동반하여 나타났으며, 광대 포고를 시작한 이유는 포고로 변신했을 때 안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이시는 많은 소년들을 집으로 유인하여 강간한 후 살해했다. 피해자를 유인하는 수법은 "포르노를 보지 않겠냐"고 유인하여 지하실로 데려가는 것이었고, 이후 수갑을 채워 움직임을 봉쇄하고 흉기로 위협하며 강간했다. 살해 방법의 대부분은 소년들이 목에 걸고 있던 묵주에 볼펜을 넣어 천천히 비틀어 질식시키는 것이었다. 살해 후 시체는 마룻바닥 아래에 매장하고 그 위에 석회를 뿌렸다. 때로는 염산을 뿌리기도 했다. 1975년 말에 게이시는 캐롤과 이혼했다. 그 이후, 게이시의 희생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5. 4. 3. 1978년
1978년 1월 6일, 경찰은 게이시를 심문했다. 게이시는 도넬리와 "노예 성행위"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모든 것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약속했던 돈을 "아이에게 지불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196] 경찰은 그를 믿고 기소하지 않았다. 다음 달, 게이시는 약혼자에게, 게이시를 알고 있던, 술집에 간다고 말한 후 2월 16일에 실종된 19세의 윌리엄 킨드레드를 살해했다. 킨드레드는 지하실에 묻힌 마지막 피해자였다.[196]3월 21일, 게이시는 26세의 제프리 링날을 차로 유인했다. 게이시는 그에게 클로로포름을 사용한 후 집으로 운전해 가서 그의 팔과 머리를 천장에 고정된 칼(pillory) 장치에 묶고 발을 또 다른 장치에 고정했다. 그는 불붙은 양초와 채찍을 포함한 도구로 링날을 강간하고 고문했으며, 반복적으로 클로로포름을 사용하여 그를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게이시는 그 후 의식을 잃은 링날을 시카고의 링컨 공원에 버렸다.
링날은 간신히 여자친구의 아파트로 비틀거리며 갔다. 경찰은 폭행 사실을 통보받았지만 게이시를 조사하지 않았다. 링날은 올즈모빌, 케네디 고속도로 및 특정 뒷골목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고속도로의 컴벌랜드 출구에 잠복했고, 4월에 링날은 올즈모빌을 발견하여 친구들과 함께 8213 웨스트 섬머데일까지 따라갔다. 게이시는 7월 15일에 체포되었고, 링날에 대한 폭행 및 폭력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978년 중반까지 지하실에는 더 이상 시체를 묻을 공간이 없었다. 게이시는 나중에 경찰에게 지하실에 시체를 보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누출"로 인한 문제에 대해 걱정했다고 자백했다. 따라서 그는 피해자들을 I-55 다리에서 데스 플레인스 강으로 버리기로 결정했다. 게이시는 1978년에 이 강에 시체 5구를 버렸으며, 그 중 하나는 지나가는 바지선에 떨어졌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발견된 시체는 4구뿐이었다.
다리에서 처음으로 버려진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는 20세의 티모시 오루크였다. 그는 담배를 사러 아파트를 나선 후 6월 중순에 살해되었다. 실종되기 직전 오루크는 룸메이트에게 노스웨스트 사이드의 한 건설업자가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11월 4일, 게이시는 19세의 프랭크 랜딩인을 살해했다. 그는 포스터 애비뉴를 따라 걷는 모습이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되었고, 그의 나체 시신은 11월 12일 오리 사냥꾼 두 명에 의해 데스 플레인스 강에 있는 유입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11월 24일, 20세의 제임스 마자라는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함께 한 후 실종되었다. 마자라는 전날 누이에게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부그하우스 스퀘어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5. 4. 4. 로버트 피스트 살해 사건
1978년 12월 11일 오후, 게이시는 데스 플레인스에 있는 닛슨 약국을 방문하여 가게 주인 필 토르프와 리모델링 계약에 대해 논의했다. 게이시는 15세 파트타임 직원 로버트 피스트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자신의 회사가 시간당 5달러의 초봉으로 10대 소년들을 고용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피스트가 약국에서 받는 급여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게이시가 약국을 떠난 직후, 피스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려가 생일 축하를 하기 위해 가게에 도착했다. 피스트는 어머니에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며 "어떤 건설업자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후 9시에 가게를 나서서 곧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피스트는 오후 10시 직후 게이시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게이시는 나중에 피스트에게 음료수를 준 뒤 "제대로 된 대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지 않겠냐"고 물었고, 피스트는 열심히 일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대답했다고 진술했다. 게이시는 이에 "좋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지만 피스트는 무시했다. 게이시는 이후 피스트를 속여 수갑을 채웠다.
게이시는 사건에 대해 다양한 진술을 남겼지만,[199] 초기 진술 중 하나에서 피스트가 바지를 벗기려는 시도에 저항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피스트의 목에 밧줄을 걸었을 때 소년이 "울고, 무서워했다"고 진술했다. 게이시는 피스트가 죽어갈 때 사업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인정했다.
6. 수사
존 웨인 게이시의 범죄 행각은 로버트 피에스트의 실종 신고에서 시작되었다. 피에스트의 가족은 그가 귀가하지 않자 데스 플레인스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고, 토프는 피에스트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가능성이 높은 계약자로 게이시를 지목했다.[41] 메인 웨스트 고등학교에 아들이 다니는 조셉 R. 코젠착 경위는 게이시에 대한 추가 조사를 결정했다. 게이시의 범죄 경력을 확인한 결과, 그는 과거 시카고에서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고, 아이오와주에서 15세 소년과의 강간 혐의로 수감된 적이 있었다.
코젠착은 데스 플레인스 경찰관 두 명과 함께 게이시의 집을 방문하여 피에스트에 대해 질문했다. 게이시는 약국에서 일하는 청소년 중 한 명에게 개조 자재를 문의한 적은 있지만, 피에스트에게 일자리를 제안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약속 수첩을 두고 와서 약국에 다시 들렀다고 해명했다. 게이시는 진술을 위해 경찰서에 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삼촌의 사망을 이유로 미뤘다.
오전 3시 20분, 게이시는 진흙투성이인 모습으로 경찰서에 나타나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에스트 실종에 대한 어떤 연루도 부인하며, 토프가 약속 수첩 때문에 전화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러나 형사들은 토프가 게이시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이시는 12월 11일, 자신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 서면 진술서를 작성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데스 플레인스 경찰은 게이시의 올즈모빌과 PDM 작업 차량을 압수하고 그를 감시했다. 수사팀은 마이클 로시로부터 그레고리 고드지크의 실종과 또 다른 PDM 직원 찰스 하툴라가 일리노이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2월 15일, 수사관들은 게이시의 과거 폭행 혐의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제프리 리그날은 게이시가 자신을 차에 유인해 클로로포름으로 기절시킨 후 강간하고 고문한 다음 링컨 공원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같은 날, 게이시의 전 부인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존 부트코비치의 실종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실종자의 반지가 존 앨런 시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크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모토로라 텔레비전을 포함한 몇 가지 물건이 사라졌다고 진술했다.
12월 16일, 게이시는 감시 형사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며 식사를 함께 하거나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는 피에스트의 실종에 대한 연루를 부인하며 형사들이 정치적 연줄이나 마약 사용 때문에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했다. 게이시는 교통 법규를 위반하며 형사들을 조롱했고, 여러 번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크람은 게이시가 과거 그에게 "죽은 사람에게서 얻었다"는 시계를 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12월 17일, 수사관들은 로시를 인터뷰하여 게이시가 시크의 차량을 자신에게 팔았다고 진술했다. 게이시의 올즈모빌 트렁크에서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섬유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수색견들은 게이시의 올즈모빌 조수석에서 "죽음 반응"을 보였고, 이는 피에스트의 시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날 저녁, 게이시는 알브레히트와 하흐마이스터 형사를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했다. 12월 18일 이른 아침, 그는 형사들을 아침 식사에 초대하여 사업, 결혼, 광대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광대는 살인을 저질러도 괜찮아."라고 말했다.
12월 18일, 게이시는 감시로 인해 스트레스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면도를 하지 않았고, 피곤하고 불안해 보였으며 술을 많이 마셨다. 그는 데스 플레인스 경찰을 상대로 75만 달러의 민사 소송을 준비하며 감시 중단을 요구했다. 같은 날, 게이시의 부엌에서 발견된 닛산 약국의 사진 영수증은 피에스트의 동료 킴벌리 바이어스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이어스는 피에스트가 실종 당일 자신의 파카를 빌려 입었고, 주머니에 영수증을 넣었다고 진술했다.
12월 19일, 수사관들은 게이시의 집에 대한 두 번째 수색 영장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게이시의 변호사들은 데스 플레인스 경찰에 대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그날 오후, 게이시는 다시 감시 형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슐츠는 시크의 것으로 의심되는 모토로라 텔레비전의 일련 번호를 확인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변기에서 부패한 시체의 냄새를 감지했다.
12월 20일, 수사관들은 크람과 로시를 인터뷰했다. 로시는 게이시가 기어가는 공간에 시체를 묻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그곳에서 참호 파기 작업을 지시하며 특정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고 진술했다. 크람은 1976년에 게이시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시도와, 게이시가 기어가는 공간에 석회를 뿌리고 배수 파이프를 위한 참호를 팠다고 진술했다. 크람은 이 참호가 폭 60cm, 길이 1.8m, 깊이 60cm로 무덤 크기였다고 덧붙였다.
12월 20일 저녁, 게이시는 민사 소송 진행 상황 논의를 위해 파크리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변호사에게 자신이 "최소 30명"을 살해했으며, 대부분을 자신의 집 기어가는 공간에 묻었고, 나머지 5구는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렸다고 자백했다. 게이시는 피해자들을 "남성 매춘부", "사기꾼", "거짓말쟁이" 등으로 폄하하며, 손이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깨어난 "죽고 목이 졸린 아이들"도 있다고 덧붙였다.[46]
술에 취한 게이시는 자백 도중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깨어난 후에도 변호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하러 떠났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온 게이시는 주유소에서 대마초를 건네며 "결말이 다가오고 있어.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일 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동료 계약자 로널드 로데에게 자신이 30명을 죽였다고 고백했고, 크람에게 예정된 법률 회의에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 후 자신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메리힐 묘지로 향했다.
게이시가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는 동안 경찰은 두 번째 수색 영장 초안을 작성했다. 특히 피에스트의 시신을 기어가는 공간에서 찾기 위한 것이었다. 12월 21일 오후 4시 30분, 게이시의 민사 소송 심리 전날 두 번째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경찰이 피에스트의 시신을 찾기 위해 기어가는 공간을 수색할 계획임을 알리자 게이시는 10대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자신의 차고 아래에 묻혀 있는 한 젊은이를 정당방위로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서명된 수색 영장을 가지고 게이시의 집에 도착한 경찰은 그가 섬프 펌프의 플러그를 뽑아 기어가는 공간에 물을 채운 것을 발견했다. 물을 빼낸 후 기어가는 공간에서 부패한 살점과 사람의 팔뼈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살인 혐의로 게이시를 기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동쪽 모서리에서 슬개골이 발견되었고, 동남쪽 모서리에서는 두 개의 다리뼈가 발견되었다. 시신 발굴 과정에서 여러 구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게이시에게 벽장 공간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는 "의혹을 풀고 싶다"고 말했다.[47] 12월 22일 이른 아침, 게이시는 변호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약 30명의 젊은 남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하는 공식 진술을 했다. 그는 그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집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대부분의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48] 그는 피해자들이 십대 가출 청소년이나 남성 매춘부였으며, 자신의 벽장 공간에 묻었다고 주장했다. 게이시는 자신의 직원들에게 나머지 참호를 파도록 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지에서 발견된 로버트 헤스턴의 운전면허증에 대해 그를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그 면허증이 그의 피해자 중 한 명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47] 그는 1979년 1월에 벽장 공간 전체를 콘크리트로 덮어 시체를 그의 소유지 아래에 더 은폐할 계획이었다고 자백했다.[48]
피에스트에 대해 질문을 받자, 게이시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12월 11일에 목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또한 12월 13일 이른 시간에 시체를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리기 전, 그날 저녁 피에스트의 시체 옆에서 잠을 잤다고 인정했다.[47] 그는 피에스트를 처리한 후 경찰서로 가는 길에 경미한 교통 사고를 당했다.
12월 23일, 게이시는 경찰, 변호사, 누나와 함께 로버트 피에스트와 다른 네 명의 희생자를 강에 던졌다고 자백한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I-55 다리로 이동했다.[48][47] 그는 자신의 차고 바닥에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주장하는 존 버트코비치를 묻은 곳을 표시하도록 지시받았다.[47] 경찰의 수사를 돕기 위해 게이시는 시체가 묻힌 곳을 나타내는 대략적인 지하실 다이어그램을 그렸다. 다음 주 동안 게이시의 벽장 공간에서 26구의 시신이 발굴되었고, 그의 소유지 다른 곳에서도 3구가 발굴되었다. 소유지의 바닥과 벽이 해체되면서 신분증과 더 많은 일탈적인 성 관련 서적이 발견되었다.[47][48]
6. 1. 첫 번째 수색 영장
12월 13일, 데스 플레인스 경찰은 게이시가 로버트 피에스트를 감금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그의 집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 수색 결과, 다음과 같은 여러 의심스러운 물품들이 발견되었다.[42]- 여러 개의 경찰 배지
- 스타팅 피스톨
- 주사기와 피하 주사기
- 수갑
- 동성애 및 소아성애 관련 서적
- 포르노 영화 및 스태그 필름
- 아질산 아밀 캡슐
- 딜도
- 각 끝에 구멍이 2개씩 뚫린 2x4 각목
- 발륨과 아트로핀 병
- 여러 개의 운전 면허증
- 파란색 파카 후드
- 게이시에게 맞지 않는 속옷
- J.A.S. 이니셜이 새겨진 동창회 반지
- 길이의 나일론 로프
- 닛산 약국의 사진 영수증
1978년, 게이시의 회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후 실종된 15세 소년 로버트 피스트의 행방을 추적하던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경부보 조셉 코제사크는 게이시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여러 유류품을 발견했다. 유류품 외에도 다수의 게이 포르노와 사용 흔적이 남은 항문 바이브레이터도 발견되었다. 집 전체를 덮고 있는 기이한 냄새는 코제사크에게 게이시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이전부터 경찰의 추궁을 받아왔던 게이시는 지역 유력 민주당 인사임을 내세워 경찰의 24시간 감시 수사를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수사를 회피해왔다.
게이시는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였고, 게이시 감시팀의 책임자 왈리 랭 부장 형사는 더 큰 죄로 그를 체포하려 했다. 왈리 랭 부장 형사는 부하의 탐문을 통해 게이시가 주유소에서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대마를 건네는 것을 알게 되자, 게이시를 마약 불법 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코제사크는 가택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게이시의 집에 진입할 수 있었다.
자백을 받은 후 게이시의 집에 대한 강제 수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집 바닥 아래에서 석회로 덮인 29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들은 바닥 아래에 정돈된 채 묻혀 있었다. 바닥 아래 공간이 부족하여 근처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려진 4구의 시신 중에는 로버트 피스트의 시신도 있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남창이었고, 일부는 그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0대 청소년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9세였고,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20세의 전 미국 해병대 해병대원 청년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신도 9구 있었다.
바닥 아래 묻힌 시신들은 모두 부패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메탄가스로 인해 현장의 경찰들은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썩은 냄새가 너무 심해 한 번 냄새가 밴 의류는 세탁이 불가능하여 소각해야 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다시 부패하기 시작했고, 위생국 분석 결과 생명과 관련된 위험 물질과 독성이 강한 세균이 다량 검출되었다. 군은 현장 수사관들에게 작업용 일회용 점프수트를 지급하고 상처를 철저히 신고하도록 했으며, 상처를 신고한 수사관은 현장에서 제외했다. 또한 수사관들의 수염을 깎는 것을 금지했으며, 경찰서의 시체 보관소는 가스실이 되었다. 시신 수색과 분석은 강렬한 악취, 질병 감염 위험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6. 2. 감시
데스 플레인스 경찰은 게이시의 올즈모빌과 다른 PDM 작업 차량을 압수했다. 수사팀(마이크 알브레히트 경관, 데이비드 하흐마이스터 경관, 로널드 로빈슨, 로버트 슐츠로 구성)은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게이시를 감시했다. 다음 날, 수사관들은 마이클 로시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는 수사관들에게 그레고리 고드지크의 실종과 또 다른 PDM 직원인 찰스 하툴라가 그해 초 일리노이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12월 15일, 데스 플레인스 수사관들은 게이시의 폭행 혐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입수했는데, 제프리 리그날이 게이시가 그를 차에 유인한 후 클로로포름으로 기절시키고 강간하고 고문한 다음 링컨 공원에 버렸다고 보고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날, 게이시의 전 부인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존 부트코비치의 실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같은 날, 그 반지는 존 앨런 시크로 추적되었다. 시크의 어머니와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아파트에서 모토로라 텔레비전을 포함한 몇 가지 물건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월 16일 무렵, 게이시는 감시 형사들에게 친근하게 대하기 시작하여 정기적으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가끔 바나 집에서 술을 함께 마시자고 초대했다. 그는 피에스트의 실종에 관련된 것을 거듭 부인했고, 정치적 연줄이나 마약 사용 때문에 형사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비난했다. 이 형사들이 사소한 일로 그를 체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교통 법규를 어기며 그들을 조롱했고, 여러 번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날 오후, 크람은 경찰 인터뷰에 동의했는데, 그는 시간 엄수를 잘 못했기 때문에 게이시가 한때 그에게 시계를 주면서 "죽은 사람에게서 얻었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수사관들은 12월 17일 로시를 공식적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게이시가 자신에게 시크의 차량을 팔았고, 캘리포니아로 이사할 돈이 필요해서 시크에게서 차를 샀다고 설명했다. 게이시의 올즈모빌을 추가로 조사한 결과, 트렁크에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의심되는 작은 섬유 덩어리가 발견되었다. 그날 저녁, 세 마리의 훈련된 수색견을 사용하여 피에스트가 게이시의 차량에 있었는지 확인했다. 한 마리는 게이시의 올즈모빌 조수석에 엎드려 있었는데, 개의 조련사는 수사관들에게 이것이 "죽음 반응"이라고 알렸으며, 피에스트의 시신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날 저녁, 게이시는 알브레히트와 하흐마이스터 형사를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했다. 12월 18일 이른 아침, 그는 그들을 또 다른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하면서 사업, 결혼, 광대 연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 중에 게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알잖아... 광대는 살인을 저질러도 괜찮아."
12월 18일 무렵, 게이시는 끊임없는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면도를 하지 않았고, 피곤하고 불안해 보였으며 술을 많이 마셨다. 그날 오후, 그는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데스 플레인스 경찰을 상대로 75만 달러의 민사 소송을 준비하며 감시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게이시의 부엌에서 발견된 닛산 약국의 사진 영수증은 피에스트의 동료인 17세 킴벌리 바이어스로 추적되었다. 바이어스는 그날 저녁 일찍 피에스트의 파카를 빌렸고, 피에스트가 가게를 나가기 전에 주머니에 영수증을 넣었다고 진술했다.
1978년, 게이시의 회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채 행방불명된 15세 소년 로버트 피스트의 행방을 쫓던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경부보 조셉 코제사크가 게이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양한 유류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류품 외에도 다수의 게이 포르노와 사용 흔적이 남은 항문 바이브레이터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를 압도한 것은 집 전체를 덮는 기이한 냄새였고, 코제사크는 게이시가 단순한 실업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게이시는 이전부터 경찰의 엄중한 추궁을 받아왔지만, 때로는 지역 유력 민주당원임을 내세워, 오히려 경찰의 24시간 감시 수사를 "인권 침해"라고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요리조리 피해 왔다.
그 무렵 게이시는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는 등, 기이한 행동이 눈에 띄었지만, 게이시를 감시하는 팀의 책임자, 왈리 랭 부장 형사는 그런 경미한 죄가 아닌 더 큰 죄로 체포하여 조사하려고 결심했다. 마침내 주유소에서 게이시가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대마를 건네는 것을 부하의 탐문으로 알게 되자, 게이시를 마약 불법 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코제사크는 가택 수색 영장을 손에 넣고 게이시의 자택에 들어갔다.
자백을 받아 게이시 자택의 강제 수사가 이루어진 결과, 29구의 시신은 석회로 덮인 집의 바닥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바닥 아래에 깔끔하게 정돈된 채로 묻혀 있었다. 다른 4구는, 바닥 아래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근처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로버트 피스트의 시신도 그곳에서 인양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남창이었으며, 몇몇은 그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10대 청년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9세였고, 20세의 전 미국 해병대 해병대원 청년이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도 9구 있었다.
바닥 아래에 묻힌 시신은 모두 부패해 있었고, 발생한 메탄에 현장의 경찰들은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너무나 썩은 냄새가 심하여, 한 번 냄새에 닿은 의류는 냄새가 배어 세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위생 면에서도 위험하다고 여겨져 착용 불가능하게 되어 소각 처분되었다. 더욱이, 흙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공기에 닿으면서 다시 썩기 시작했다. 위생국의 분석으로 생명과 관련된 위험한 물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게다가 독성이 강한 세균이 검출되었다. 이 때문에 군은 현장 수사관들에게 작업용으로 일회용 점프수트를 지급하고, 상처의 자기 신고를 철저히 하도록 했으며, 상처를 신고한 수사관을 현장에서 제외하고, 전원 수염을 깎는 것을 금지했다. 경찰서의 시체 보관소는 가스실이 되었다.
이 시신 수색과 분석은 강렬한 악취와 질병 감염과의 싸움이 되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동반했다.
6. 3. 두 번째 수색 영장
12월 19일, 수사관들은 게이시의 집에 대한 두 번째 수색 영장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게이시의 변호사들은 데스 플레인스 경찰에 대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심리는 12월 22일로 예정되었다. 그날 오후, 게이시는 다시 감시 형사들을 자신의 집 안으로 초대했다. 로빈슨이 게이시와 대화로 주의를 끄는 동안, 슐츠는 시크의 것으로 의심되는 모토로라 텔레비전의 일련 번호를 적기 위해 게이시의 침실로 들어갔지만 실패했다. 게이시의 변기를 내리는 동안, 그 경찰관은 난방 덕트에서 부패한 시체의 냄새가 나는 것을 감지했다. 이전에 게이시의 집을 수색했던 경찰관들은 집이 추웠기 때문에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수사관들은 12월 20일에 크람과 로시를 모두 인터뷰했다. 로시는 게이시가 피에스트의 시체를 어디에 숨겼을 것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게이시가 기어가는 공간에 시체를 묻었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로시는 거짓말 탐지기 검사에 동의했다. 그는 피에스트의 실종에 관련된 사실이 없으며, 그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곧 심문을 계속 거부했고, 거짓말 탐지기에 연결된 동안 로시의 "불규칙하고 일관성 없는" 답변은 코젠착이 그의 진실성에 대해 "확실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시는 기어가는 공간에서 했던 참호 파기에 대해 더 논의했고, 게이시가 그에게 지시된 곳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고집했던 것에 대해 언급했다.
크람은 수사관들에게 1976년에 게이시가 그를 강간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알렸다. 그는 12월 13일 수색 후 그와 게이시가 집으로 돌아온 후, 게이시가 그의 카펫에 묻은 흙 덩이를 보고 창백해졌고, 즉시 기어가는 공간으로 들어가 파낸 흔적을 찾았다고 말했다. 크람은 기어가는 공간에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게이시가 한 번은 그에게 그곳에 석회를 뿌리라고 요청했고, 또한 배수 파이프를 위한 것이라고 게이시가 설명했던 참호를 팠다고 답했다. 크람은 이 참호가 폭 60cm, 길이 1.8m, 깊이 60cm였다고 말했다. 이는 무덤의 크기였다.
1978년, 게이시의 회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채 행방불명된 15세 소년 로버트 피스트의 행방을 쫓던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경부보 조셉 코제사크가 게이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양한 유류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류품 외에도 다수의 게이 포르노와 사용 흔적이 남은 항문용 바이브레이터도 발견되었다.
마침내 주유소에서 게이시가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대마를 건네는 것을 부하의 탐문으로 알게 되자, 게이시를 마약 불법 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코제사크는 가택 수색 영장을 손에 넣고 게이시의 자택에 들어갔다.
자백을 받아 게이시 자택의 강제 수사가 이루어진 결과, 29구의 시신은 석회로 덮인 집의 바닥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바닥 아래에 깔끔하게 정돈된 채로 묻혀 있었다. 다른 4구는, 바닥 아래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근처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로버트 피스트의 시신도 그곳에서 인양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남창이었으며, 몇몇은 그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10대 청년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9세였고, 20세의 전 미국 해병대 해병대원 청년이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도 9구 있었다.
바닥 아래에 묻힌 시신은 모두 부패해 있었고, 발생한 메탄가스에 현장의 경찰들은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너무나 썩은 냄새가 심하여, 한 번 냄새에 닿은 의류는 냄새가 배어 세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위생 면에서도 위험하다고 여겨져 착용 불가능하게 되어 소각 처분되었다. 더욱이, 흙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공기에 닿으면서 다시 썩기 시작했다. 위생국의 분석으로 생명과 관련된 위험한 물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게다가 독성이 강한 세균이 검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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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 1. 자백
12월 20일 저녁, 게이시는 민사 소송 진행 상황 논의를 위해 파크리지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불안하고 초췌해 보이는 게이시는 술을 찾았고, 변호사 샘 아미란테가 시그램 위스키를 제공하자 즉시 두 잔을 마셨다.[44] 아미란테는 게이시의 무죄 주장에 의문을 품고 "나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할 말이 있다고 했어! 중요한 거!"라며 데일리 헤럴드 신문을 그의 책상에 놓았다. 게이시는 신문을 집어 들고 피에스트 실종 사건을 다룬 1면을 가리키며 "이 소년은 죽었어. 그는 죽었어. 그는 강에 있어."라고 말했다.이후 게이시는 다음 날 새벽까지 두서없는 자백을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를 "많은 사람들의 판사, 배심원과 처형자"라고 칭하며 이제 자신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최소 30명"을 살해했으며, 대부분을 자신의 집 기어가는 공간에 묻었고, 나머지 5구는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렸다고 자백했다. 게이시는 피해자들을 "남성 매춘부", "사기꾼", "거짓말쟁이" 등으로 폄하하면서, 손이 뒤로 수갑이 채워진 채 깨어난 "죽고 목이 졸린 아이들"도 있다고 덧붙였다.[46] 그는 그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고, 그들의 시신을 기어가는 공간에 묻었다.
술에 취한 게이시는 자백 도중 잠이 들었다. 아미란테는 즉시 그날 아침 게이시의 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 몇 시간 후 깨어난 게이시는 아미란테로부터 약 30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글쎄, 지금은 이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어. 해야 할 일이 있어."라고 말하며 변호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일하러 떠났다.
게이시는 나중에 자유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고 회상하며 체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을 방문하여 작별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고 덧붙였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온 게이시는 주유소로 가서 대마초가 든 작은 가방을 출납원에게 건넸다. 출납원은 즉시 감시 요원에게 가방을 넘기며 게이시가 자신에게 "결말이 다가오고 있어(나에게).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일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게이시는 그 다음 동료 계약자이자 친구인 로널드 로데의 집으로 향했다. 게이시는 로데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나쁜 놈이었어. 30명을 죽였어, 몇 명 더 있을 수도 있고."라고 말했다. 게이시는 로데를 떠나 크램의 집으로 가서 크램과 로시를 만났다. 감시 요원들은 그가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동안 턱에 묵주를 대고 기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크램, 로시와 대화를 나눈 후 게이시는 크램에게 예정된 법률 회의에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크램은 감시 요원들에게 게이시가 전날 밤 변호사들에게 30명 이상의 살인을 자백했다고 자신과 로시에게 말했다고 알렸다. 게이시는 그 다음 크램에게 자신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메리힐 묘지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게이시가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는 동안 경찰은 두 번째 수색 영장 초안을 작성했다. 특히 피에스트의 시신을 기어가는 공간에서 찾기 위한 것이었다. 게이시의 불안정한 행동으로 자살 시도 가능성을 우려한 감시 형사들의 보고에 따라 경찰은 두 번째 수색 영장이 공식적으로 요청됨에 따라 그를 대마초 소지 및 유통 혐의로 체포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1일 오후 4시 30분, 게이시의 민사 소송 심리 전날 두 번째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경찰이 피에스트의 시신을 찾기 위해 기어가는 공간을 수색할 계획임을 알리자 게이시는 10대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부인했지만, 자신의 차고 아래에 묻혀 있는 한 젊은이를 정당방위로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서명된 수색 영장을 가지고 경찰과 증거 기술자들이 게이시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게이시가 섬프 펌프의 플러그를 뽑아 기어가는 공간에 물을 채운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플러그를 다시 꽂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이후 증거 기술자 다니엘 젠티는 8.5 x 11.6 미터 크기의 기어가는 공간으로 들어가 서남쪽 지역을 파기 시작했다. 몇 분 만에 그는 부패한 살점과 사람의 팔뼈를 발견했다. 젠티는 수사관들에게 게이시를 살인 혐의로 기소할 수 있다고 알리며 "이곳은 아이들로 가득 찬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경찰 사진작가는 북동쪽 모서리에서 슬개골을 발견했다. 그들은 동남쪽 모서리를 파기 시작하여 두 개의 다리뼈를 발견했다.
발굴된 피해자들의 시신은 너무 심하게 부패되어 피에스트의 것일 수 없었다. 북동쪽 모서리에서 시신을 발굴하는 동안 범죄 현장 기술자는 시신 옆에서 두 번째 피해자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나중에 두 번째 피해자의 발을 발굴한 결과 시신 아래에서 또 다른 두개골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기술자들은 첫 번째 시신이 발견된 참호로 돌아가 네 번째 피해자의 가슴우리를 발견하면서 살인의 규모를 확인하게 되었다.
6. 3. 2. 체포
경찰은 게이시의 벽장 공간에서 유골을 발견하고 살인 혐의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렸다. 이에 게이시는 경찰에게 "의혹을 풀고 싶다"고 말했다.[47] 12월 22일 이른 아침, 게이시는 변호사들이 입회한 가운데 약 30명의 젊은 남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하는 공식 진술을 했다. 그는 그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47] 일부 피해자들은 이름으로 언급되었지만, 게이시는 대부분의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48] 그는 모두 십대 가출 청소년이나 남성 매춘부였으며, 그들 대부분을 자신의 벽장 공간에 묻었다고 주장했다.[47] 게이시는 이 장소에 단 다섯 개의 무덤만 팠고, 그의 직원들(고드직 포함)에게 나머지 참호를 파도록 시켜 "무덤을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소유지에서 발견된 로버트 헤스턴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자, 게이시는 이 사람을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이 면허증이 그의 피해자 중 한 명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47] 그는 또한 1979년 1월에 벽장 공간 전체를 콘크리트로 덮어 시체를 그의 소유지 아래에 더 은폐할 계획이었다고 자백했다.[48]피에스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받자, 게이시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12월 11일에 목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또한 12월 13일 이른 시간에 시체를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리기 전, 그날 저녁 피에스트의 시체 옆에서 잠을 잤다고 인정했다.[47] 그는 피에스트를 처리한 후 경찰서로 가는 길에 경미한 교통 사고를 당했다. 그의 차량은 얼음이 덮인 도로에서 미끄러져 견인되어야 했다.[47]
12월 23일, 경찰, 그의 변호사들, 그리고 그의 누나와 동행한 게이시는 로버트 피에스트와 다른 네 명의 희생자를 강에 던졌다고 자백한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I-55 다리로 이동했다.[48][47] 게이시는 그 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존 버트코비치라고 밝힌,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묻은 곳을 보여주기 위해 차고 바닥에 주황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표시하도록 지시받았다.[47] 경찰의 수사를 돕기 위해 게이시는 시체가 묻힌 곳을 나타내는 대략적인 지하실 다이어그램을 그렸다. 다음 주 동안 게이시의 벽장 공간에서 26구의 시신이 발굴되었고, 그의 소유지 다른 곳에서도 3구가 발굴되었다. 소유지의 바닥과 벽이 해체되면서 신분증과 더 많은 일탈적인 성 관련 서적을 포함한 추가 증거가 발견되었다.[47][48]
7. 재판
존 웨인 게이시는 1980년 2월 6일 33건의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49] 그는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에서 루이스 B. 가리포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쿡 카운티에서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 때문에 배심원은 록퍼드에서 선발되었다.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게이시는 재판 전 1년 동안 체스터에 있는 메나드 교도소에서 의사들과 300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는 정신적으로 재판을 받을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 검사를 받았다. 게이시는 의사들에게 자신이 다중 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는 근면하고 시민 의식이 투철한 계약자, 광대, 적극적인 정치인, 그리고 "나쁜 잭"이라고 불리는 경찰관 잭 핸리, 이렇게 네 가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이시는 경찰에게 자백했을 때, 그는 동성애를 혐오하고 남성 매춘부를 "약하고, 어리석고, 타락한 쓰레기"로 간주하는 잭의 범죄를 전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사들은 게이시가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도록 선택했다.
게이시의 변호인 중 한 명인 로버트 모타는 개회 진술에서 "정신 이상 변호는 탈출구로,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정신 이상 변호는 유효하며 여기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변호인데, 왜냐하면 진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게이시]가 정상이라면, 우리의 정상성 개념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게이시를 지킬과 하이드 캐릭터로 제시하면서, 변호 측은 게이시를 검사한 여러 정신과 전문가들을 내세웠으며, 그 중 세 명은 그가 다중 인격을 가진 편집성 정신 분열증 환자라고 증언했다.
검찰은 게이시가 제정신이었고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통제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의 계획성과 그가 발각을 피하기 위해 취한 노력에 대해 증언할 여러 증인을 내세웠다. 이들 의사들은 다중 인격과 정신 이상에 대한 변호 측 의사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크람과 로시는 게이시가 그들에게 배수 도랑을 파고 자신의 기어가는 공간에 석회를 뿌리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둘 다 게이시가 자신들과 그들이 감독하는 다른 직원들이 그가 표시한 정확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기어가는 공간을 들여다봤다고 말했다.[16]
2월 18일, 로버트 스타인은 게이시의 재산에서 수습된 모든 시신이 "뚜렷하게 부패하고 부패하여 해골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그가 실시한 모든 부검 결과 13명의 피해자가 질식으로, 6명이 끈으로 목 졸려, 1명이 가슴에 여러 차례 칼에 찔려 사망했고, 10명은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다.[50] 게이시의 변호팀이 33명의 사망이 우발적인 성적 질식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제안하자 스타인은 이는 매우 있을 법하지 않다고 말했다.
제프리 리그놀은 2월 21일 변호 측을 위해 증언했다. 리그놀은 1978년 3월 게이시가 자신에게 가한 고문을 묘사하면서 반복적으로 울었다. 고문과 관련된 특정 반대 심문 중에 리그놀은 구토를 했고 더 이상의 증언에서 면제되었다. 2월 29일, 도널드 부어히스는 게이시의 손에 의해 겪은 고난과 게이시의 사주를 받은 폭행에 대해 증언했다. 부어히스는 증언할 수 없다고 느꼈지만 중단 요청을 받기 전 잠시 시도했다. 로버트 도넬리는 부어히스 일주일 후에 증언하면서 1977년 12월 게이시의 손에 의해 겪은 고난을 이야기했다. 도넬리는 학대를 떠올리며 눈에 띄게 괴로워했다.
재판 5주차에 게이시는 가리포 판사에게 변호사들의 정신 이상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변호사가 자신이 증언대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며(그가 원했던 대로), 변호 측이 충분한 의학 증인을 소환하지 않았고, 경찰이 체포 후 형사들에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두 진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어쨌든 그 진술은 검찰의 사용을 위한 "자기 변호"라는 등의 이유로 미결정을 요청하는 개인적인 편지를 썼다. 가리포 판사는 게이시에게 양측 변호인 모두 전문가 증인을 소환할 기회나 자금을 거부당하지 않았으며, 법에 따라 그가 증언하고 싶은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판사에게 그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고 알렸다.
게이시는 정신 감정을 위해 시카고의 셀마크 정신 병원의 범죄 정신과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내 안에는 4명의 잭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네 번째 잭 "잭 핸리"가 한 일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게이시에 따르면, 그 안의 4명의 잭이 게이시의 육체를 컨트롤하며, 그 사이의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첫 번째 잭은 술과 마약을 하고 소년을 찾으러 나가 소년을 차에 태워 성관계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두 번째 잭이 나타나 행위가 끝나면 알몸으로 차 밖으로 내던지고 그대로 도망쳐 즐긴다고 한다. 나는 살인과 담당 베테랑 형사라고 게이시에게 말했다고 한다. 두 번째 잭이 낚은 소년을 자택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는 것이 세 번째 잭이며, 마음씨 좋은 경찰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잭이 소년을 타이를 때 갑자기 나타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소년을 데려가는 것이 네 번째 잭이라고 한다.
게이시의 증언을 얻은 것은 1978년 9월 27일이었다. 콜럼버스 시티즌 저널은 빌리 밀리건 사건에 대해 밀리건이 10개의 인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1면 톱 기사로 다룬 지 3개월 후였다.
게이시는 다중 인격 장애로 진단받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80년 2월 6일부터 시작된 공판에서 게이시는 자신이 다중 인격이라고 계속 주장하며 무죄를 호소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주장을 기각하고 유죄 평결을 내렸다. 33명의 젊은 남성을 살해한 이유로 다중 인격을 내세웠지만 "사기"로 간주되었다. 1980년에 12번의 사형 판결과 21번의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산을 이용하여 20번 이상의 상소와 모범적인 복역 생활로 형을 면해왔다. 또한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과 경찰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억울한 누명을 주장하고, 사형 제도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상고를 반복했다. 이에 미국 내에서 비난이 집중되었고, 빠른 사형 집행을 원하는 사람들이 데모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게이시를 심리학적으로 감정한 임상의는 "그의 IQ는 상당히 높고, 신경학 테스트를 비롯한 7가지 테스트에서도 뇌 손상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한편 로르샤흐 테스트나 주제 통각 검사에서는 이상을 느끼게 하는 반응을 보였으며, 심리적인 안정을 보는 미네소타 다면 인격 목록(MMPI)에서 게이시가 매우 이상하며, 사고의 혼란으로 정신 분열 또는 망상증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검사 결과에서 게이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인정되었다. 전 스탠퍼드 대학교 행동 과학 과장 및 연구 센터 회장 로렌스 프리드먼은 게이시를 매우 흉폭하고 왜곡된 성욕에 휩싸이게 하는 인격상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게이시의 트라우마를 알코올에 빠져 있던 아버지와 현재까지 이어진 본인 자신의 발작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어릴 때부터 그를 괴롭히던 심신증과 신경증이 그의 범죄성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이러한 사례를 벌할지 벌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것은 법과 사회의 경계상의 문제이며, 심리학의 입장에서는 언급할 수 없습니다"라고도 말했다.
7. 1. 최종 변론
3월 11일, 검사 테리 설리번은 최종 변론에서 게이시의 젊은이 학대 행적, 발각을 피하려는 노력, 그리고 생존 피해자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묘사하며 게이시를 "모든 살인자 중 최악"이라고 칭했다. 설리번은 "존 게이시는 수많은 지상의 재앙보다 더 많은 인간적 파괴를 초래했다… 그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빠져나갈 뻔했는지 생각하면 전율이 흐른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변호사 샘 아미란테는 설리번이 증거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의뢰인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비난하며, 게이시가 "통제할 수 없는 강박에 의해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검찰이 게이시가 정신적으로 온전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배심원들에게 의뢰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무죄 평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아미란테는 게이시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하며 그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3월 12일, 윌리엄 컹클 검사는 정신 이상에 대한 변호 측의 주장을 "가짜"라고 언급하며, 게이시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컹클은 1968년에 게이시를 검사하고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진단한 의사의 증언을 언급하며, 그의 권고가 받아들여졌다면 게이시는 석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게이시의 신원이 확인된 22명의 피해자 사진을 전시판에서 제거하고 배심원들에게 동정을 보이지 말고 "정의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배심원들은 1시간 50분 동안 심의한 결과, 게이시는 33건의 살인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또한 로버트 피에스트와 관련된 성폭행 및 아동에 대한 음란한 행위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51][52] 당시 그의 33건의 살인 유죄 판결은 미국 역사상 개인에게 내려진 가장 많은 살인 혐의였다.[53][54]
재판의 선고 단계에서 배심원들은 1977년 6월에 사형에 관한 일리노이 주 법이 발효된 이후 저질러진 각 살인 사건에 대해 게이시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2시간 이상 심의했다.[55] 그의 사형 집행은 1980년 6월 2일로 예정되었다.
게이시는 정신 감정을 위해 시카고의 셀마크 정신 병원의 범죄 정신과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내 안에는 4명의 잭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네 번째 잭 "잭 핸리"가 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하며 다중 인격 장애를 주장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이 주장을 기각하고 유죄 평결을 내렸다.
게이시를 심리학적으로 감정한 결과, 그는 높은 IQ를 가졌지만, 로르샤흐 테스트나 주제 통각 검사에서 이상 반응을 보였고, 미네소타 다면 인격 목록(MMPI)에서 정신 분열 또는 망상증의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로렌스 프리드먼은 게이시가 흉폭하고 왜곡된 성욕에 휩싸이게 하는 인격상으로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8. 사형수 감방
선고 후 게이시는 메나드 교정 센터로 이송되어 14년 동안 사형수로 수감되었다.[56] 감방에 격리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때때로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56] 그는 자신, 광대 (포고나 패치 포함), 그리스도, 일곱 난쟁이, 해골, 엘비스 프레슬리, 존 딜린저 등 다양한 대상을 묘사하며 영감을 얻었다.[57] 그의 그림은 전시회에 전시되고[58][59] 경매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재판 전, 게이시는 언론인 러스 잉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가졌다.[60] 잉은 작가 팀 케이힐과 협력하여 《매장된 꿈》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게이시가 잉에게 털어놓은 첫 번째 살인 사건의 정황은 그의 첫 번째 피해자의 신원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61]
1983년 2월 15일, 동료 사형수 헨리 브리스본이 날카롭게 갈아놓은 철사로 게이시의 팔을 찔렀다. 그는 교도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62]
수감 후, 게이시는 법률 서적을 읽고 방대한 양의 탄원서와 항소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항소는 1978년 12월 13일 데스 플레인스 경찰에 발부된 최초의 수색 영장의 유효성, 그리고 변호인의 정신 이상 변론에 대한 그의 반대 등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되었다. 게이시는 자신이 5건의 살인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28건의 살인은 그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집에 열쇠를 가지고 있던 직원들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1984년 중반, 일리노이 주 대법원은 게이시의 유죄 판결을 유지하고 11월 14일에 치사 주사형으로 사형을 명령했다. 그는 이 결정에 항소했지만, 미국 대법원은 1985년 3월 4일에 이를 기각했다. 이듬해 게이시는 새로운 재판을 요구하는 추가적인 유죄 판결 후 탄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그의 변호사였던 리처드 클링은 게이시가 1980년 재판에서 부실한 법적 조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탄원서는 1986년 9월 11일에 기각되었다.[63]
게이시는 자신의 사형을 결정한 1985년 결정을 항소했다. 일리노이 주 대법원은 1988년 9월 29일에 그의 유죄 판결을 유지하고 1989년 1월 11일에 새로운 사형 집행일을 정했다.[64] 미국 대법원이 1993년 10월 게이시의 마지막 항소를 기각한 후, 일리노이 주 대법원은 1994년 5월 10일로 공식적인 사형 집행일을 정했다.[65]
8. 1. 사형 집행
1994년 5월 9일 아침, 게이시는 사형 집행을 위해 스테이트빌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교도소 부지에서 가족과 함께 소풍을 즐겼다. 그의 마지막 식사로는 KFC 치킨, 감자튀김, 튀긴 새우 12마리, 신선한 딸기,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했다.[66] 그날 저녁, 그는 가톨릭 사제로부터 종부성사를 받았다.[67][68][69]사형 집행 몇 시간 전, 1,000명이 넘는 군중이 교도소 밖에 모였다. 다수는 사형 집행을 지지했고, 소수의 사형 반대 시위자도 있었다.[70][71] 일부 사형 집행 찬성자들은 게이시가 광대로서 지역 사회에 봉사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티셔츠를 입고 "광대에게 눈물은 없다"와 같은 슬로건을 적었다.[72]
오전 12시 40분, 치사 주사 투여가 시작되었지만, 사용된 화학 물질이 굳어 정맥 주사관을 막았다. 사형 집행팀은 튜브를 교체했고 사형은 재개, 전체 절차는 18분이 걸렸다.[73] 마취과 의사들은 이 문제를 교도소 관계자들의 미숙함 탓으로 돌렸다. 이 오류로 인해 일리노이주가 치사 주사의 대체 방법을 채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게이시 재판의 검사였던 윌리엄 쿤클은 "그는 희생자들보다 훨씬 더 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다.[74]
게이시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어떤 후회도 나타내지 않은 정신병자로 진단받았다. 그의 사형 직전 최후 진술은 그를 죽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손실을 보상하지 않을 것이며, 주가 그를 살해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74] 마지막 육성 발언은 "내 엉덩이에 키스해라"였지만,[75] 2020년 검사 윌리엄 쿤클은 이 발언이 게이시의 사형 전 공식 진술의 일부가 아니라 교도소 관계자에게 한 말이라고 진술했다.[76]
1994년 5월 10일 오전 12시 58분에 게이시의 사망이 확인된 후, 그의 뇌는 적출되었다. 그의 뇌는 게이시 재판에서 변호 측 증인이었던 헬렌 모리슨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녀는 폭력적인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공통적인 성격 특징을 분리하기 위해 게이시와 다른 연쇄 살인범들을 인터뷰했다. 그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의 행방은 공개되지 않았다.[77]
한편, 게이시는 다수의 범죄자에게 관심을 갖고 편지를 보내온 당시 18세 소년 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게이시는 이후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 통화를 했고, 소년에게 "사람을 죽인 진짜 이유를 알려주겠다"며 교도소로 초대해 면회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소년을 34번째 희생자로 만들려고 꾀했다. 모범수로서의 신용을 이용하여 칸막이 등이 없는 면회실에서 간수 없이 면회를 허락받아 소년과 단둘이 면회를 하게 되었고, 그를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로 유인하여 범행을 저지르려 했지만, 간수가 지나가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이 범행은 재심 청구를 기각시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1994년5월 10일 심야, 졸리엣 교도소에서 약물 주사가 집행되었다. 그가 원했던 마지막 식사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프렌치 프라이, 새우튀김, 딸기, 다이어트 코크 등 젊은 시절의 성공을 상징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158] 일반적으로 약물 주사형에 의한 사형은 평균 7분 전후로 끝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약효에 문제가 생겨 게이시는 20분 가까이 고통스러워하며 사망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 코멘트를 요구받은 담당 검사 윌리엄 캉클은 "피해자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게이시의 고통은 별 것 아니지"라고 말했다.
9. 그 후
존 웨인 게이시 사건은 사회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게이시 사건 이후, 실종 아동에 대한 신속한 대응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일리노이주 의회는 1984년 미아 아동 구조법을 제정하여 실종 아동 수색 시 72시간의 대기 기간을 없앴다. 이 법은 다른 주에도 영향을 주어 전국적인 실종 아동 찾기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었고, 이는 앰버 경보 시스템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159]
게이시의 범행 현장이었던 그의 집에서는 끔찍한 광경이 드러났다. 쿡 카운티 검시관 로버트 스타인의 감독 하에 크롤 공간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이 발굴되었는데, 각 시신에는 식별 번호가 부여되었다. 처음 수습된 시신은 1979년 1월 6일에 존 프레스티지로 확인되었지만, 사망 원인은 불명이었다. 이후 존 부트코비치, 존 시직, 그레고리 고드지크 등의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었고, 매튜 보우먼은 목에 지혈대가 감긴 채 발견되기도 했다. 티모시 맥코이는 콘크리트 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갈비뼈와 흉골에 자창이 있어 게이시의 첫 번째 희생자로 추정되었다.[61][82][83] 크리스마스 연휴 이후 수색이 재개되어 더 많은 시신이 발굴되었으며, 일부 희생자는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게이시는 좁은 공간이 가득 차자 시신을 데스 플레인스 강에 유기하기 시작했다.[96] 티모시 오루크, 프랭크 랜딩인, 제임스 마자라로 확인된 시신들이 강에서 발견되었으며, 로버트 피에스트의 시신 역시 데스 플레인스 강가에서 발견되었다.[97]
수사 결과, 게이시에게 살해된 피해자는 총 33명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도 5명이다.[118] 2011년부터 신원 미확인 피해자들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고,[159] 법의학적 안면 복원을 통해 희생자들의 얼굴을 추정하기도 했다.[105][106] 윌리엄 번디, 제임스 하켄슨, 프란시스 웨인 알렉산더가 DNA 검사 등을 통해 추가적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31]
게이시는 총 45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와 연관된 피해자는 33명이었다.[118] 그는 1978년 3월 제프리 리그널을 폭행한 후 풀어준 뒤 살해한 피해자들을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리기 시작했다고 진술했지만, 강에서 발견된 시신 중 4구만 그와 연관되었다.[120] 찰스 안토니오 하툴라의 죽음 또한 게이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익사로 결론났다.[127] 시카고 경찰의 퇴직 경찰관 빌 도르시는 게이시가 관리인으로 있었던 아파트 건물 부지에 더 많은 피해자가 묻혀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2013년 수색 결과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128][133]
한편, 게이시에게 마지막으로 살해당할 뻔했던 제이슨 모스는 과거 흉악 살인범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취미를 가졌었다. 찰스 맨슨이나 제프리 다머와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게이시에게 습격당한 이후 이 취미는 사라진 듯하다. 모스는 미시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여 범죄 피해자 변호사가 되었지만, 2006년 6월 6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자살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157]
10. 피해자
존 웨인 게이시의 범행으로 희생된 피해자들은 33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중 28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14세의 새뮤얼 스테이플턴과 마이클 마리노였고,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21세의 프랜시스 알렉산더와 러셀 넬슨이었다.
이름 | 나이 | 살해 날짜 | 신원 확인 날짜 | 발견 번호 | 발견 장소 |
---|---|---|---|---|---|
티모시 잭 맥코이 | 16 | 1972년 1월 3일 | 1986년 5월 9일 | 시신 9 | 지하실 |
존 부트코비치 | 18 | 1975년 7월 31일 | 1978년 12월 29일 | 시신 2 | 차고 |
대럴 줄리어스 삼손 | 18 | 1976년 4월 6일 | 1979년 11월 18일 | 시신 29 | 식당 |
랜들 웨인 레페트 | 15 | 1976년 5월 14일 | 1979년 4월 12일 | 시신 7 | 지하실 |
새뮤얼 G. 도드 스테이플턴 | 14 | 1976년 5월 14일 | 1979년 11월 14일 | 시신 6 | 지하실 |
마이클 로렌스 보닌 | 17 | 1976년 6월 3일 | 1979년 1월 6일 | 시신 18 | 지하실 |
윌리엄 휴이 캐롤 주니어 | 16 | 1976년 6월 13일 | 1979년 3월 17일 | 시신 22 | 지하실 |
제임스 바이런 하켄슨 | 16 | 1976년 8월 5일 | 2017년 7월 19일 | 시신 24 | 지하실 |
릭 루이스 존스턴 | 17 | 1976년 8월 6일 | 1979년 1월 1일 | 시신 23 | 지하실 |
케네스 레이 파커 | 16 | 1976년 10월 24일 | 1980년 3월 29일 | 시신 15 | 지하실 |
마이클 M. 마리노 | 14 | 1976년 10월 24일 | 시신 14 | 지하실 | |
윌리엄 조지 번디 | 19 | 1976년 10월 26일 | 2011년 11월 29일 | 시신 19 | 지하실 |
프랜시스 웨인 알렉산더 | 21 | c. 1976년 12월 1일 | 2021년 10월 25일 | 시신 5 | 지하실 |
그레고리 존 고드지크 | 17 | 1976년 12월 12일 | 1978년 12월 29일 | 시신 4 | 지하실 |
존 앨런 시즈크 | 19 | 1977년 1월 20일 | 시신 3 | 지하실 | |
존 스티븐 프레스티지 | 20 | 1977년 3월 15일 | 1979년 1월 6일 | 시신 1 | 지하실 |
매튜 월터 보우먼 | 19 | 1977년 7월 5일 | 1979년 1월 29일 | 시신 8 | 지하실 |
로버트 에드워드 길로이 주니어 | 18 | 1977년 9월 15일 | 1979년 1월 6일 | 시신 25 | 지하실 |
존 안세니 모웨리 | 19 | 1977년 9월 25일 | 1979년 1월 27일 | 시신 20 | 지하실 |
러셀 로이드 넬슨 | 21 | 1977년 10월 17일 | 1979년 1월 6일 | 시신 16 | 지하실 |
로버트 데이비드 윈치 | 16 | 1977년 11월 10일 | 1979년 9월 11일 | 시신 11 | 지하실 |
토미 조 볼링 | 20 | 1977년 11월 18일 | 시신 12 | 지하실 | |
데이비드 폴 탈스마 | 19 | 1977년 12월 9일 | 1979년 11월 16일 | 시신 17 | 지하실 |
윌리엄 웨인 킨드레드 | 19 | 1978년 2월 16일 | 1979년 5월 16일 | 시신 27 | 지하실 |
티모시 데이비드 오루크 | 20 | 1978년 6월 16–23일 | 1979년 1월 9일 | 시신 31 | 데스 플레인스 강 |
프랭크 윌리엄 랜딩인 | 19 | 1978년 11월 4일 | 1978년 11월 14일 | 시신 32 | 데스 플레인스 강 |
제임스 마자라 | 20 | 1978년 11월 24일 | 1978년 12월 30일 | 시신 33 | 데스 플레인스 강 |
로버트 제롬 피에스트 | 15 | 1978년 12월 11일 | 1979년 4월 9일 | 시신 30 | 데스 플레인스 강 |
게이시는 체포 후, 1978년 3월 제프리 리그널을 폭행하고 풀어준 뒤 피해자들의 시신을 데스 플레인스 강에 유기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5구의 시신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했다고 자백했지만, 강에서 발견된 시신 중 4구만이 그와 관련되었다.
6월 30일 I-55 다리에서 9.7 km 떨어진 하류에서 발견된 피해자는 처음에는 게이시와 관련이 없었다.[96] 1979년 1월 9일, 이 피해자는 지문 기록과 독특한 문신을 통해 티모시 오루크로 확인되었다. 부검 결과 질식이 사망 원인인지 배제할 수 없었다.[96] 이 피해자는 31번으로 기록되었다. 게이시가 체포된 후 수사관들은 그가 또 다른 피해자임을 발견했다.
프랭크 랜딩인의 사망 원인은 부검 결과 그의 속옷이 목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시신은 또한 지문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사망 전날 랜딩인에게 발급된 보석금 영수증이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그는 피해자 32번으로 지정되었다.
12월 28일, 게이시와 관련된 시신이 I-55 다리에서 1.6 km 떨어진 곳에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 피해자는 이틀 후 제임스 마자라로 확인되었으며, 게이시는 추수감사절 직후 그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39] 마자라는 끈으로 목 졸려 사망했다.
1979년 4월 9일, 그런디 카운티 견인로를 걷던 한 남자가 데스 플레인스 강가에서 뿌리에 엉킨 채 부패된 시신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치과 기록을 통해 시신이 로버트 피에스트임이 확인되었다. 부검 결과 "종이 같은 물질"이 목구멍에 쑤셔 넣어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97]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는 5명이다.[98] 경찰은 게이시의 자백, 지하실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위치, 법의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신원 미확인 희생자들이 살해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99]
- 1972년 1월 3일 – 1975년 7월 31일. 시신 28. 뒷마당. 14~18세 남성.[20]
- 1976년 6월 13일 – 8월 5일. 시신 26. 지하실. 23~30세 남성.[100]
- 1976년 8월 6일 – 10월 5일. 시신 13. 지하실. 17~22세 남성.[101]
- 1976년 8월 6일 – 10월 24일. 시신 21. 지하실. 15~24세 남성.[102]
- 1977년 3월 15일 – 7월 5일. 시신 10. 지하실. 17~21세 남성.[104]
2011년 10월, 쿡 카운티 보안관 토마스 다트는 신원 미확인 희생자들의 DNA 프로파일링을 확보한 수사관들이 신원 확인 노력을 갱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트 보안관은 1970년에서 1979년 사이에 실종된 남성과 관련된 DNA 샘플을 미국 전역에서 찾고 있다고 말했다.[107]
2011년 11월, 윌리엄 번디가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31] 2017년 7월, 16세의 제임스 하켄슨이 DNA 검사를 사용하여 신원이 확인되었다.[116] 프란시스 웨인 알렉산더는 2021년 10월 법의 유전자 계보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117]
게이시는 수사관들에게 살해된 피해자가 총 45명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게이시와 연관된 피해자는 33명이었다.[118]
2012년과 2016년 사이에 실시된 DNA 및 치아 검사 결과, 1980년에 게이시의 기어다니는 공간에서 발견되어 케네스 파커와 마이클 마리노로 확인된 시신 중 실제로 마리노의 시신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21][122][123]
1978년 5월 23일, 25세의 찰스 안토니오 하툴라는 일리노이주 프리포트 인근의 페카토니카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 그는 PDM의 직원이자 마이클 로시가 수사관들에게 고드직의 실종과 하툴라의 죽음을 모두 알린 후 게이시 수사에 연루되었다. 하툴라가 사망했을 당시, 게이시의 기어다니는 공간에는 더 이상 시신을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하툴라의 시신을 페카토니카 강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데스 플레인스 당국은 게이시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프리포트에 연락했고, 하툴라가 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툴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익사에 의한 질식사로 결론났다.[127]
시카고 경찰의 퇴직 경찰관 빌 도르시는 게이시가 몇 년 동안 관리인으로 있었던 시카고 웨스트 마이애미 애비뉴의 한 아파트 건물 부지에 더 많은 피해자가 묻혀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진술했다.[128] 2013년 1월, 부지 굴착에 대한 두 번째 요청이 승인되었고, 봄에 부지 수색이 실시되었다. FBI 탐지견과 지반 관통 레이더 장비가 모두 사용되었지만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133]
한편, 게이시에게 마지막으로 살해당할 뻔했던 제이슨 모스는 과거 흉악 살인범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취미를 가졌는데, 찰스 맨슨, 제프리 다머 외에도 게이시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모스는 뛰어난 수재였지만, 2006년 6월 6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60] 게이시 사건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더불어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0. 1. 크롤 공간
쿡 카운티 검시관 로버트 스타인은 게이시의 집에 매장된 피해자들의 발굴을 감독했다.[78] 크롤 공간은 구획으로 표시되었고 각 시신에는 식별 번호가 부여되었다. 크롤 공간에서 처음 수습된 시신에는 피해자를 시신 1번으로 표시하는 표식이 할당되었다.[79] 이 시신은 1979년 1월 6일에 존 프레스티지(Jon Prestidge)로 확인되었다.[39] 사망 원인은 확인할 수 없었다.존 부트코비치(John Butkovich)는 시신 2번으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 12월 29일에 처음 확인되었다.[39] 12월 23일, 수사관들은 시신 1번과 같은 참호에 묻힌 시신 3구를 발굴하기 위해 돌아왔다.[79] 시신 3번(존 시직, John Szyc)은 시신 4번(그레고리 고드지크, Gregory Godzik) 바로 위에 크롤 공간에 매장되었으며, 둘 다 1978년 12월 29일에 확인되었다.[39] 시신 5번은 시신 1번 바로 아래에 매장되었으며, 이 피해자는 토양 표면에서 91cm 아래에서 발견되어 이 공동 묘지에 처음 묻힌 것으로 나타났다.[79]
수색은 크리스마스 동안 연기되었다. 12월 26일에 시신 4구가 더 발굴되었다.[80] 시신 6번(사무엘 스테이플턴, Samuel Stapleton, 1979년 11월 14일 치과 기록으로 신원 확인)과 시신 7번(랜달 레페트, Randall Reffett, 1979년 4월 12일 X선으로 신원 확인)은 같은 묘에 매장되었다.[39] 레페트는 입에 천 조각을 물고 태아 자세로 발견되어 수사관들은 그가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39] 시신 8번(매튜 보우먼, Matthew Bowman, 1979년 1월 29일 신원 확인)은 목에 그를 졸랐던 지혈대와 함께 발견되었다.[39][81] 시신 9번(티모시 맥코이, Timothy McCoy, 1986년 5월 치과 기록과 독특한 벨트 버클로 신원 확인)은 콘크리트 층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갈비뼈와 흉골에 여러 자창이 있어 게이시의 첫 번째 피해자임을 시사했다.[61][82][83]
12월 27일, 시신 8구가 더 발견되었다.[84] 게이시 집 입구 아래에 묻힌 시신 10번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 시신은 17세에서 21세 사이이며 키가 170cm에서 180cm로 추정되었다.[85] 시신 11번과 시신 12번은 모두 목에 묶인 끈이 있었고, 크롤 공간 중앙에 나란히 묻혀 있었으며, 1979년 9월 11일 각각 로버트 윈치(Robert Winch)와 토미 볼링(Tommy Boling)으로 확인되었다.[39] 시신 13번(아직 신원 미상)은 여분의 침실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17세에서 22세 사이이며 키가 175cm에서 188cm로 추정되었다.[86] 시신 14번과 15번은 공동 묘지에서 수습되었으며, 둘 다 머리와 상체가 별도의 비닐 봉투 안에 있었다.[86] 이들은 치과 기록과 방사선 이미지를 사용하여 1980년 3월 29일에 마이클 마리노(Michael Marino)와 케네스 파커(Kenneth Parker)로 확인되었다(게이시 재판 전에 확인된 피해자들에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87][88] 시신 16번(러셀 넬슨, Russell Nelson, 1979년 1월 6일 신원 확인)은 목구멍 깊숙이 천 조각이 박혀 질식사한 채 발견되었다.[39][86] 열일곱 번째 피해자(1979년 11월 16일 방사선 이미지로 데이비드 탈스마, David Talsma로 확인)는 목에 끈이 있었다.[86]
다음 날, 시신 4구가 더 발굴되었다.[89] 시신 19번은 게이시의 안방 바로 아래에 묻혀 있었고, 시신 18번(마이클 보닌, Michael Bonnin, 1979년 1월 6일 신원 확인)은 여분의 침실 아래에 있었으며, 목에 끈이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39] 시신 20번(존 모어리, John Mowery, 1979년 1월 27일 치과 기록으로 신원 확인)은 크롤 공간의 북서쪽 모서리에 매장되었다.[39]
12월 29일까지 시신 6구가 더 발굴되었다. 시신 22, 23, 24, 26번은 게이시의 주방과 세탁실 아래 공동 묘지에 매장되었으며,[39] 시신 25번(로버트 길로이, Robert Gilroy, 1979년 1월 6일 신원 확인)은 게이시의 욕실 아래에 있었다.[39]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 26번은 23세에서 30세 사이였고 키는 약 163cm로 추정되었다.[90] 시신 22번(치과 기록을 사용하여 1979년 3월 17일에 윌리엄 캐롤, William Carroll로 확인됨)[39]은 게이시의 주방 아래에서 목에 천 조각이 박힌 채 발견되었다. 골반 부위에서 양말 두 짝이 발견되었다.[39] 그는 전날 수습된 시신 21번 바로 아래에 묻혀 있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 피해자는 15세에서 24세 사이였고 키는 약 178cm로 추정되었다.[91] 시신 23번(1979년 1월 1일 릭 존스턴, Rick Johnston으로 확인)과 24번의 뼈가 뒤섞였으며, 천 조각이 시신 24번과 26번의 입안에서 발견되었다.[39] 시신 25번은 게이시의 욕실 아래에서 목에 천 조각이 박힌 채 발견되었다. 크롤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수습된 피해자(윌리엄 킨드레드, William Kindred, 1979년 5월 16일 신원 확인) 역시 욕실 아래에서 목구멍 깊숙이 천 조각이 박힌 채 발견되었다.[39]
1979년 시카고 눈보라로 인해 작전이 중단되었지만, 게이시는 매장된 모든 피해자를 찾았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3월에 재개되었다.[92] 3월 9일, 시신 28번은 여러 비닐 봉투에 싸여 게이시 뒷마당의 파티오 아래에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93] 게이시의 두 번째 살인 피해자는 약 175cm였고, 14세에서 18세 사이로 추정된다.[93] 3월 16일, 시신 29번(다렐 샘슨, Darrell Samson, 1979년 11월 18일 신원 확인)은 식당 아래에서 발견되었다.[39]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된 모든 피해자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치과 기록과 X선 차트가 스타인이 유해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6][94] 23명은 치과 기록으로, 2명은 골격 외상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식별은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된 개인 유물로 뒷받침되었다.[94]
게이시 재산 아래에서 발굴된 여러 시신의 머리와 상체는 비닐 봉투에 넣어져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처방전 병과 같은 이물질이 골반 부위에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위치는 해당 물품이 피해자의 항문에 꽂혀 있었음을 나타냈다.[79] 스타인은 게이시 재산에서 수습된 12명의 피해자가 질식사했다고 결론 내렸다.[83] 게이시의 비어 있는 집은 1979년 4월에 철거되었다.[95]
1978년, 게이시의 회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채 행방불명된 15세 소년 로버트 피스트의 행방을 쫓던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경부보 조셉 코제사크가 게이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양한 유류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류품 외에도 다수의 게이 포르노와 사용 흔적이 남은 항문용 바이브레이터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를 압도한 것은 집 전체를 덮는 기이한 냄새였고, 코제사크는 게이시가 단순한 실업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게이시는 이전부터 경찰의 엄중한 추궁을 받아왔지만, 때로는 지역 유력 민주당원임을 내세워, 오히려 경찰의 24시간 감시 수사를 "인권 침해"라고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요리조리 피해 왔다.
그 무렵 게이시는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는 등, 기이한 행동이 눈에 띄었지만, 게이시를 감시하는 팀의 책임자, 왈리 랭 부장 형사는 그런 경미한 죄가 아닌 더 큰 죄로 체포하여 조사하려고 결심했다. 마침내 주유소에서 게이시가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대마를 건네는 것을 부하의 탐문으로 알게 되자, 게이시를 마약 불법 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코제사크는 가택 수색 영장을 손에 넣고 게이시의 자택에 들어갔다.
자백을 받아 게이시 자택의 강제 수사가 이루어진 결과, 29구의 시신은 석회로 덮인 집의 바닥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바닥 아래에 깔끔하게 정돈된 채로 묻혀 있었다. 다른 4구는, 바닥 아래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근처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로버트 피스트의 시신도 그곳에서 인양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남창이었으며, 몇몇은 그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10대 청년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9세였고, 20세의 전 미국 해병대 해병대원 청년이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도 9구 있었다.
바닥 아래에 묻힌 시신은 모두 부패해 있었고, 발생한 메탄가스에 현장의 경찰들은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너무나 썩은 냄새가 심하여, 한 번 냄새에 닿은 의류는 냄새가 배어 세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위생 면에서도 위험하다고 여겨져 착용 불가능하게 되어 소각 처분되었다. 더욱이, 흙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공기에 닿으면서 다시 썩기 시작했다. 위생국의 분석으로 생명과 관련된 위험한 물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게다가 독성이 강한 세균이 검출되었다. 이 때문에 군은 현장 수사관들에게 작업용으로 일회용 점프수트를 지급하고, 상처의 자기 신고를 철저히 하도록 했으며, 상처를 신고한 수사관을 현장에서 제외하고, 전원 수염을 깎는 것을 금지했다. 경찰서의 시체 보관소는 가스실이 되었다.
이 시신 수색과 분석은 강렬한 악취와 질병 감염과의 싸움이 되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동반했다.
10. 2. 데스 플레인스 강
6월 30일 I-55 다리에서 9.7 km 떨어진 하류에서 발견된 피해자는 처음에는 게이시와 관련이 없었다.[96] 1979년 1월 9일, 이 피해자는 지문 기록과 독특한 문신을 통해 티모시 오루크로 확인되었다. 부검 결과 질식이 사망 원인인지 배제할 수 없었다.[96] 이 피해자는 31번으로 기록되었다. 게이시가 체포된 후 수사관들은 그가 또 다른 피해자임을 발견했다.
프랭크 랜딩인의 사망 원인은 부검 결과 그의 속옷이 목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시신은 또한 지문 기록을 통해 확인되었다. 사망 전날 랜딩인에게 발급된 보석금 영수증이 게이시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그는 피해자 32번으로 지정되었다.
12월 28일, 게이시와 관련된 시신이 I-55 다리에서 1.6 km 떨어진 곳에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 피해자는 이틀 후 제임스 마자라로 확인되었으며, 게이시는 추수감사절 직후 그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39] 마자라는 끈으로 목 졸려 사망했다.
1979년 4월 9일, 그런디 카운티 견인로를 걷던 한 남자가 데스 플레인스 강가에서 뿌리에 엉킨 채 부패된 시신을 발견했다. 그날 저녁 치과 기록을 통해 시신이 로버트 피에스트임이 확인되었다. 부검 결과 "종이 같은 물질"이 목구멍에 쑤셔 넣어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다.[97]
1978년, 게이시의 회사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간 채 행방불명된 15세 소년 로버트 피스트의 행방을 쫓던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경부보 조셉 코제사크가 게이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다양한 유류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류품 외에도 다수의 게이 포르노와 사용 흔적이 남은 항문용 바이브레이터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를 압도한 것은 집 전체를 덮는 기이한 냄새였고, 코제사크는 게이시가 단순한 실업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게이시는 이전부터 경찰의 엄중한 추궁을 받아왔지만, 때로는 지역 유력 민주당원임을 내세워, 오히려 경찰의 24시간 감시 수사를 "인권 침해"라고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요리조리 피해 왔다.
그 무렵 게이시는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는 등, 기이한 행동이 눈에 띄었지만, 게이시를 감시하는 팀의 책임자, 왈리 랭 부장 형사는 그런 경미한 죄가 아닌 더 큰 죄로 체포하여 조사하려고 결심했다. 마침내 주유소에서 게이시가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 대마를 건네는 것을 부하의 탐문으로 알게 되자, 게이시를 마약 불법 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코제사크는 가택 수색 영장을 손에 넣고 게이시의 자택에 들어갔다.
자백을 받아 게이시 자택의 강제 수사가 이루어진 결과, 29구의 시신은 석회로 덮인 집의 바닥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은 바닥 아래에 깔끔하게 정돈된 채로 묻혀 있었다. 다른 4구는, 바닥 아래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근처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로버트 피스트의 시신도 그곳에서 인양되었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남창이었으며, 몇몇은 그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10대 청년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9세였고, 20세의 전 미국 해병대 해병대원 청년이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였다. 상태가 좋지 않아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도 9구 있었다.
바닥 아래에 묻힌 시신은 모두 부패해 있었고, 발생한 메탄가스에 현장의 경찰들은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느꼈다. 너무나 썩은 냄새가 심하여, 한 번 냄새에 닿은 의류는 냄새가 배어 세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위생 면에서도 위험하다고 여겨져 착용 불가능하게 되어 소각 처분되었다. 더욱이, 흙 속에 묻혀 있던 시신이 공기에 닿으면서 다시 썩기 시작했다. 위생국의 분석으로 생명과 관련된 위험한 물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게다가 독성이 강한 세균이 검출되었다. 이 때문에 군은 현장 수사관들에게 작업용으로 일회용 점프수트를 지급하고, 상처의 자기 신고를 철저히 하도록 했으며, 상처를 신고한 수사관을 현장에서 제외하고, 전원 수염을 깎는 것을 금지했다. 경찰서의 시체 보관소는 가스실이 되었다.
이 시신 수색과 분석은 강렬한 악취와 질병 감염과의 싸움이 되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동반했다.
10. 3. 신원 미확인 피해자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는 5명이다.[98] 경찰은 게이시의 자백, 지하실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위치, 법의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신원 미확인 희생자들이 살해된 시기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99]- 1972년 1월 3일 – 1975년 7월 31일. 시신 28. 뒷마당. 14~18세 남성.[20]
- 1976년 6월 13일 – 8월 5일. 시신 26. 지하실. 23~30세 남성.[100]
- 1976년 8월 6일 – 10월 5일. 시신 13. 지하실. 17~22세 남성.[101]
- 1976년 8월 6일 – 10월 24일. 시신 21. 지하실. 15~24세 남성.[102]
- 1977년 3월 15일 – 7월 5일. 시신 10. 지하실. 17~21세 남성.[104]
1979년 가을, 법의학 전문가 베티 팻 개틀리프는 신원 미확인 희생자들의 두개골을 사용하여 법의학적 안면 복원을 제작했다.[105][106]
2011년부터 신원 미확인 피해자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159]
한편, 게이시에게 마지막으로 살해당할 뻔했던 제이슨 모스는 과거 흉악 살인범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취미를 가졌었다. 찰스 맨슨과 제프리 다머와도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게이시에게 습격당한 이후 이 취미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모스는 10세에 대통령 표창의 성적 우수 학생상을 수상하고, 네바다 대학교 라스베이거스를 수석으로 졸업, 2002년 미시간 대학교로스쿨을 졸업하여 범죄 피해자 변호사가 되었지만[157], 2006년6월 6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자살했다.[160]
10. 3. 1. 최근 신원 확인 노력
2011년 10월, 쿡 카운티 보안관 토마스 다트는 신원 미확인 희생자들의 DNA 프로파일링을 확보한 수사관들이 신원 확인 노력을 갱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트 보안관은 기자 회견에서 수사관들이 1970년에서 1979년 사이에 실종된 남성과 관련된 DNA 샘플을 미국 전역에서 찾고 있다고 말했다.[107]
지금까지 세 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었고, 게이시의 희생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 실종된 청소년들이 다수 있으며,[108][109] 1972년에서 1979년 사이에 발생한 관련 없는 네 건의 미제 사건이 해결되었다.[110][111][112][113] 시신 10과 13에 대한 업데이트된 얼굴 복원도가 2018년에 공개되었다.[114]
2011년 11월, 윌리엄 번디가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31] 게이시 체포 직후, 번디의 가족은 그의 치과 기록을 신원 미확인 시신과 비교하기 위해 제출하기를 희망하며 치과의사에게 연락했지만, 치과의사가 은퇴한 후 기록이 파기되었다.[115] 2017년 7월, 16세의 제임스 하켄슨이 DNA 검사를 사용하여 신원이 확인되었다.[116] 프란시스 웨인 알렉산더는 2021년 10월 법의 유전자 계보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117]
2011년부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159]
마지막으로 살해당할 뻔했던 제이슨 모스는 이전에 복역 중인 흉악 살인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심리를 연구하는 것을 취미로 했다고 한다. 게이시 외에도 악명 높은 찰스 맨슨이나 제프리 다머와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게이시에게 습격당한 이후 이 취미는 사라진 듯하다.
모스는 불과 10세에 대통령 표창의 성적 우수 학생상을 수상한 미국 유수의 성적 우수자였으며, 그 후 네바다 대학교 라스베이거스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02년에 미시간 대학교로스쿨을 졸업하여 범죄 피해자의 변호사가 되었지만[157], 안타깝게도 2006년6월 6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자살했다.[160]
10. 4. 추가적인 희생자 가능성
존 웨인 게이시는 체포 당시 수사관들에게 살해된 피해자가 총 45명에 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게이시와 연관된 피해자는 33명이었다.[118] 수사관들은 게이시의 부지에서 기초 지반 아래의 기질을 드러낼 때까지 굴착 작업을 벌여 29구의 시신을 발견했다.[118]체포 직후 게이시는 1978년 3월 제프리 리그널을 폭행한 후 풀어준 뒤 살해한 피해자들을 데스 플레인스 강에 버리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5구의 시신을 처리했다고 자백했지만, 데스 플레인스 강에서 발견된 시신 중 4구만 그와 연관되었다. 피해자가 더 있는지 묻는 질문에 게이시는 "그건 당신들이 알아내야 할 일"이라고 답했다.[120]
2012년과 2016년 사이에 실시된 DNA 및 치아 검사 결과, 1980년에 게이시의 기어다니는 공간에서 발견되어 케네스 파커와 마이클 마리노로 확인된 시신 중 실제로 마리노의 시신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21][122][123] 마리노의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본 이후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일치하지 않아 아들의 신원을 항상 의심했다.[124] 파커의 발굴된 시신에 대한 DNA 검사 결과 마리노의 시신이 그와 혼동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또한, 마이클 마리노로 확인된 피해자에 대해 실시된 치과 방사선 사진 검사 결과, 그는 모든 제2 대구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1976년 3월 마리노에게 실시된 치과 엑스레이 검사 결과, 하나의 대구치가 아직 치아 맹출되지 않았다. [125] 발굴된 시신에는 상악골과 하악골이 모두 없었기 때문에 시신의 원래 신원이 논란이 되고 있다.[126]
1978년 5월 23일, 25세의 찰스 안토니오 하툴라는 일리노이주 프리포트 인근의 페카토니카 강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 그는 5월 13일부터 실종된 상태였다. 하툴라는 PDM의 직원이자 마이클 로시가 수사관들에게 고드직의 실종과 하툴라의 죽음을 모두 알린 후 게이시 수사에 연루되었다. 게다가 로시는 하툴라가 게이시와 갈등을 겪고 있었고, 하툴라가 "출근하지 않았을 때" 게이시가 그와 다른 여러 직원들에게 그가 익사했다고 알렸다고 진술했다. 하툴라가 사망했을 당시, 게이시의 기어다니는 공간에는 더 이상 시신을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하툴라의 시신을 페카토니카 강에 유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데스 플레인스 당국은 게이시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프리포트에 연락했고, 하툴라가 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툴라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익사에 의한 질식사로 결론났다.[127]
시카고 경찰의 퇴직 경찰관 빌 도르시는 게이시가 몇 년 동안 관리인으로 있었던 시카고 웨스트 마이애미 애비뉴의 한 아파트 건물 부지에 더 많은 피해자가 묻혀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진술했다.[128] 1975년 당시 시카고 경찰관이었던 도르시는 우연히 알고 지내던 게이시가 이른 아침에 삽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르시가 그에게 따지자 게이시는 낮에 너무 바빠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르시는 또한 웨스트 마이애미 애비뉴의 다른 여러 거주자들이 1970년대 초중반에 게이시가 그 부지에서 참호를 파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129] 2012년 3월, 쿡 카운티 보안관 사무실은 이 부지의 굴착을 요청했다. 쿡 카운티 검사는 1998년 부지 수색 결과 등을 포함하여 상당한 이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부했다.[131] 그러나 보안관 사무실은 1998년 레이더 조사에서 부지 내 14개의 관심 지점이 나타났지만 이 중 2곳만 굴착되었고, 나머지 4곳은 사람의 골격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암시적"이라고 묘사되었다고 언급했다.[132] 2013년 1월, 부지 굴착에 대한 두 번째 요청이 승인되었고, 봄에 부지 수색이 실시되었다. FBI 탐지견과 지반 관통 레이더 장비가 모두 사용되었지만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다.[133]
2011년부터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159]
한편, 마지막으로 살해당할 뻔했던 제이슨 모스는 이전에 복역 중인 흉악 살인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것을 취미로 했다고 한다. 게이시 외에도 찰스 맨슨이나 제프리 다머와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게이시에게 습격당한 이후 이 취미는 사라진 듯하다.
모스는 불과 10세에 대통령 표창의 성적 우수 학생상을 수상한 미국의 수재였으며, 그 후 네바다 대학교 라스베이거스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02년에 미시간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여 범죄 피해자의 변호사가 되었지만, [157] 2006년 6월 6일 네바다주 헨더슨 자택에서 자살했다.[160]
11. 잠재적 공범
존 웨인 게이시 체포 후 그는 수사관들에게 여러 살인 사건에서 혼자 범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내 공범"의 체포 여부를 물었다. 그는 공범들이 살인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진술했으며, 이후 크람과 로시가 여러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135] 일부 변호사와 수사관들은 "게이시가 공범과 함께 일했다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며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135]
1980년대에 게이시는 FBI 프로파일러 로버트 레슬러에게 PDM 직원 "두세 명"이 여러 살인을 도왔다고 말했다. 레슬러는 이 사건에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게이시가 여러 주에서 33명 이상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게이시는 이에 대해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1978년 3월, 게이시에게 폭행과 고문을 당한 제프리 린갈은 고문 중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집 안 다른 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고 증언했다.[21]
게이시 체포 3일 전, 경찰은 게이시가 술집에서 직원 마이클 로시, 에드 헤프너와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게이시는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희는 내게 빚을 졌어."라고 말했고, 로시는 게이시에게 "그래서? 다른 다섯 명처럼 묻힌 거야?"라고 물었다.[135]
게이시는 사형수 감방에서 체포 당시 PDM 직원 세 명이 살인 용의자로 간주되었으며, 그들 모두 그의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크람과 로시 외에 전 직원 필립 파스크의 이름도 언급했는데, 그는 존 데이비드 노먼과 가까운 사이였고 크람의 지인이었다. 1970년대 후반, 노먼은 시카고에 기반을 둔 성매매 조직인 델타 프로젝트를 운영했다.[136] 게이시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두 명의 피해자(케네스 파커, 마이클 마리노)가 노먼이 살았던 곳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으며,[137] 이를 근거로 게이시가 이 매춘 조직과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138]
게이시는 확인된 피해자 중 16명이 사라졌을 때 시카고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2012년, 두 명의 변호사는 여행 기록을 근거로 그가 세 건의 살인 사건 당시 다른 주에 있었다며 공범의 존재 가능성을 제기했다.[139][140]
수사관들은 피해자 러셀 넬슨이 실종 당시 동행자 로버트 영이 그의 실종에 대해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고 지적했다.[141] 영은 넬슨의 부모에게 수색 자금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시카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넬슨의 형제들이 그를 찾아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영은 그들에게 PDM에서 일자리를 제안했다.[140] 영은 게이시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지 않았다.[141]
12. 영화 및 미디어
1992년에는 TV 영화 《살인자를 잡아라》가 개봉했다. 브라이언 데네히가 게이시 역을 맡았으며, 로버트 피에스트의 실종 이후 데스 플레인스 경찰의 게이시 수사 및 체포를 주로 다룬다.[142]
2003년에는 극장 영화 《게이시》가 개봉했다. 마크 홀튼이 게이시 역을 맡았으며, 1971년 노우드 파크로 이사한 후 1978년 체포될 때까지의 삶을 그린다.[143] 같은 해에 영화 《존 게이시》도 개봉했다.
2010년에는 TV 영화 《친애하는 미스터 게이시》가 개봉했다. 윌리엄 포사이스가 게이시 역으로 출연하며, 제이슨 모스의 저서 《마지막 희생자》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영화는 게이시가 1994년 사형수로 있던 모스를 면회에 초대하기 전, 모스와 게이시 사이의 서신 교환에 초점을 맞춘다.[144] 같은 해 공포 영화 《8213: 게이시 하우스》, 《디어 미스터 게이시》가 개봉했다. 《8213: 게이시 하우스》는 초자연 현상 연구가들이 8213 W. 섬머데일의 옛 부지에 지어진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을 다룬다.[145]
디스커버리 채널은 진실 범죄 시리즈 《뉴 디텍티브스: 법의학 연구 사례》에서 게이시의 범죄에 관한 에피소드를 방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게이시와 FBI 프로파일러 로버트 레슬러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146]
인베스티게이션 디스커버리 채널은 게이시 살인 사건에 대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첫 번째는 법의정신과 의사 마이클 스톤이 살인자와 사이코패스를 분석하는 법의학 프로그램인 《가장 사악한 자》 시리즈를 위해 제작되었다. 두 번째는 《악은 여기 산다》 시리즈에 소개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게이시의 행동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며, 게이시의 여동생과 조카가 인터뷰 대상에 포함되었다.
바이오그래피 채널은 게이시의 범죄에 관한 4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147]
텔레비전 프로그램 《심령 수사대》는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를 방영했다.[148] 이 프로그램은 조셉 코젠자크 형사와 심령술사 캐롤 브로먼 사이의 상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코젠자크 형사는 1978년 12월 17일에 브로먼을 만나 로버트 피에스트의 시신 행방에 대해 논의했다.
라이프타임 무비 네트워크 시리즈 《우리 가족의 괴물》은 2015년 8월에 "살인 광대: 존 웨인 게이시"를 방영했다. 이 에피소드는 게이시의 여동생 카렌 쿠즈마와 그녀의 딸을 다루며, 게이시의 초기 삶에서 그의 이후 범죄를 촉발했을 수 있는 중요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149][150]
다큐멘터리 시리즈 《존 웨인 게이시: 변장한 악마》는 피콕이 제작했으며, 첫 번째 에피소드는 2021년 3월에 방영되었다. 이 6부작 시리즈는 게이시, 그의 체포를 담당한 수사관, 그리고 쿡 카운티 보안관 토마스 다트와의 인터뷰를 포함한다.[151]
《살인자와의 대화: 존 웨인 게이시 테이프》는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조 벌린저가 감독한 시리즈로, 게이시와 그의 변호사 간의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대화 녹음을 포함한다. 이 3부작 중 첫 번째는 2022년 4월 20일에 방영되었다.[152] 같은 해 영화 《블랙 폰》이 개봉했는데, 코멘터리에서 존 게이시 사건을 참고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변호사 다이어리》는 게이시의 변호사 로버트 모타의 아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게이시와 그의 변호사와의 재판 전 인터뷰의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카세트 녹음을 포함한다.[153][154]
《존 웨인 게이시 살인 사건: 시카고에서의 삶과 죽음》은 존 보로스키가 제작 및 감독한 8부작 다큐멘터리 미니시리즈로, 2024년에 공개되었다. 게이시의 체포 및 유죄 판결에 책임이 있는 여러 개인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155]
한편, 스티븐 킹의 1986년 소설로 1990년에 TV 드라마, 2017년에 영화화된 《그것》에 등장하는 광대 살인마 페니와이즈는 트롤이 나오는 동화 "세 마리의 염소 그루펠르"를 힌트로 만들어졌지만, 게이시 사건의 영향도 지적받고 있다[161][162]。
독일 밴드 후베르트 카(Hubert Kah)의 1986년 앨범 《w:Tensongs|Tensongs》의 1번 트랙 'Pogo the Clown'은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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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베리-디, 《연쇄 살인범을 만드는 방법: 순수한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가학적인 살인마로 뒤틀리는 과정》(How to Make a Serial Killer: The Twisted Development of Innocent Children into the World's Most Sadistic Murderers), Simon & Schuster, 2008, ISBN 978-1-569-75943-1
- 크리스토퍼 베리-디, 《연쇄 살인마: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고문자, 사이코패스, 대량 살인마의 세계 내부》(Serial Killers: Up Close and Personal. Inside the World of Torturers, Psychopaths, and Mass Murderers), 율리시스 출판사(Ulysses Press), 2007, ISBN 978-1-569-75619-5
- 팀 케이힐, 《묻힌 꿈: 연쇄 살인범의 마음 속으로》(Buried Dreams: Inside the Mind of a Serial Killer), Bantam Books, 1993 (원저 1986), ISBN 978-1-857-02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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